나, 흙길처럼 부드러워지리라

여덟 편의 시로 쓴 지리산 종주기

등록 2005.08.02 14:02수정 2005.08.0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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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리산

지리산 ⓒ 이윤행

지리산에 다녀왔습니다. 기차를 타고 구례나 곡성을 지날 때마다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던 산. 허리와 무릎관절에 병이 도진 뒤로는 꿈속에서나 오를 수 있었던 백두대간 최남단에 자리한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제 곁에 산을 사랑하는 '올뫼산악회' 동료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29일, 성삼재 휴게소에서 출발하여 노고단-임걸령-노루목-삼도봉-뱀사골 산장(1박)-토끼봉-삼각봉-형제봉-벽소령-세석산장(2박)-촛대봉-연하봉-장터목산장-제석봉-천왕봉-백무동 코스로 지리산 종주를 마치기까지 저의 아름다운 도반이 되어준 것은 동료교사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방학을 잘 지내기로 약속한 아이들도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방학을 하던 날, 저는 반 아이들에게 방학계획서를 받았습니다. 방학계획서를 받기 전에 저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핍이지요.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거. 인간이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해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과 열심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채우는 것이지요.

방학은 무언가를 길게 계획하여 실천할 수 있는 여유와 자유로움이 있지요. 한 달 내내 노는 것도 지루할 테니 적어도 절반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선생님도 방학 중에 지리산 종주를 도전해보려고 해요."

저는 아이들과 한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리산 종주를 불과 열흘 남짓 앞두고 오른쪽 무릎관절이 삐걱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고사하고 평지를 걷는 것도 무리가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지리산 종주를 포기해야하는가? 저는 내심 슬프고 불안한 마음에 산악회 대표를 맡고 있는 이윤행 선생님께 전화하여 상의를 했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여덟 편의 시에 담아보았습니다. 산행소감문 대신 써본 보잘 것 없는 시편들을 2박 3일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며 지리산 종주를 무사히 마친 저를 포함한 11명의 동료교사들, 그리고 방학을 잘 보내고 있을 우리 반 35명의 제자들에게 바칩니다.


1. 준비
-부드러움에 대하여

지리산 종주를 열흘 남짓 앞두고
오른쪽 무릎관절이 삐걱거렸다.


병원에 가자니
아내가 눈치 챌 것 같고
해서, 부드러운 흙길을 골라
매일 산길을 걸었다.

함께 예비 산행을 해준
고마운 벗들이 있어
무릎관절이 씻은 듯이 나았다.

생각해보니
나를 강하게 단련시킨 것은
흙길의 부드러움이었다.

부드러운 것이 강했다.


a 지리산 야생화

지리산 야생화 ⓒ 안준철

2. 산수국
-노루목에서

누구의 배려가 이리 고운가.

험한 바위산 오르막마다
숨 고르며 바라보노니
바람 한 점 없어도
가슴 무장 서늘해진다.

청보석에 나비가 내려앉은 듯
곱디고운 너의 자태를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가는 이는
무엇을 얻으려 산에 온 것일까?

작은 꽃이여!
나도 너를 다 보지 못하니

내 영혼의 크기만큼만
너를 담아갈 수 있겠다.
내 자유의 크기만큼만
너를 노래할 수 있겠다.

생전 처음
내게 눈을 주신 분께
감사드리다.


a 지리산

지리산 ⓒ 이윤행

3. 별
-뱀사골 산장에서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지만
소원을 말하기도 전에
별똥별은 꼬리를 감추고 말지.

나는 꾀를 좀 부려
별똥별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
단 한 음절의 소원을
간절히 외우고 있었지.

별…

별처럼 나도
누군가의 그리움이
되고 싶었기에.

별빛에 영혼을
그을리고 싶었기에.


a 지리산 야생화

지리산 야생화 ⓒ 이윤행

4. 야생화
-세석평전에서

산이 과묵해 보인 것은
순전히 내 선입견 탓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 앙증한 꽃들은 뭐란 말인가?

밤새 그가
바람과 나뒹굴며 한 일을
알 것도 같다.


a 지리산

지리산 ⓒ 안준철

5. 어느 평범한 하루라도
-촛대봉에서

나 지금 구름 속에 있네.

밤하늘을 수놓던 뭇별들
마지막 안부를 전하듯
눈물 글썽이다 스러지고

나 구름 속에서
눈부신 새 아침을 몰고 올
또 하나의 별을 기다리고 있네.

여름엔 일출을 보기가 어렵다고
서편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이 수상쩍다고
모두들 한 마디씩 하는 동안에도
나는 가슴이 뜨거웠네.

어느 평범한 하루라도
이런 설렘으로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런 기다림으로 간절해질 수 있다면!

그 기다림 더 깊어지라고
구름은 끝내 해를 내놓지 않았지만
내 마음 허전하지 않았네.

이미 내 가슴에 떠오른
뜨거운 불덩이가 있었으니.


a 지리산 야생화

지리산 야생화 ⓒ 이윤행

6. 아름다운 도반
-제석봉에서

이 험준한 산길을
맨 먼저 누가 걸어갔을까?

없는 길을 걸어서 길을 내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을까?

가슴앓이 하는 누이를 위해
약초뿌리를 캐러 갔을까?

탐관오리 한 놈 때려눕히고
젊은 아비, 다리 절며 뛰어 갔을까?

땅에서 길을 잃어
하늘에다 길을 내려 했을까?

이 첩첩산중에 혼자서
얼마나 막막하고 외로웠을까?

앞 사람 뒤꿈치만 보며 따라가다
나는 문득 안도한다.

내겐 함께 길을 가는
소중한 벗들이 있음을.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앞서간 그들도 내게 길을 열어준
아름다운 도반이었음을.


a 지리산

지리산 ⓒ 이윤행

7. 산
-천왕봉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여,
그대 이름은 정복자.
나를 그대 발아래 두려 했다면
헛된 땀을 흘렸구나.

내려가거든 다시 올 때는
다정한 벗으로 오라.
서둘러 오지 말고
쉬엄쉬엄 오라.

소풍날 보물찾기 하듯
풀숲언덕, 바위너설에 피어 있는
나리꽃, 모싯대, 산수국
예쁜 꽃들에게도 눈길을 주면서 오라.

그대 오는 길목에
종달새가 마중 나갔으니
그대가 짓밟은 노예의 신음 소리가 아닌
자유인의 싱그러운 노래를 들으며 오라.

서둘지 말고
쉬엄쉬엄 오라.


a 지리산과 야생화

지리산과 야생화 ⓒ 안준철

8. 하산
-백무동에서

산을 내려가는 길에도 오르막은 있었다.
그래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 것은
길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결국은 사람에 대한 신뢰였으리라.

산을 내려오며
나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믿고 부드러워지리라.
흙길처럼 부드러워지리라.

부드러움으로 강해지리라.


이번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제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부드러움'이라는 단어입니다. 저는 남은 방학 동안 독서와 여행을 통해서 부드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부드러운 교사가 되어야겠지요.

가파른 오르막마다 예쁜 꽃밭을 만들어놓고 잠시 숨을 고르게 한 지리산의 고운 마음. 그것이 바로 부드러움이겠지요. 또한, 자녀들에게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방학을 만들어주는 것도 부모로서의 부드러운 배려가 되겠지요. 방학다운 방학을 보내야 개학하면 열심히 공부할 맛이 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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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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