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요. 무슨 말인지… 자기야… 뭐라고 그래요"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테러

등록 2005.08.04 16:54수정 2005.08.0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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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라고 쉼터에서 모여서 밤을 새던 베트남 아줌마 셋이 핸드폰을 들이대며, "이 사람, 며칠 전부터 계속 전화 와요. 무서워요"라고 하기에, 전화를 가만히 들고는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았습니다. 제가 수화기를 들자, 옆에 있던 보틔이(Vo Tuey)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전화를 해 온 사람이 "자기야, 나야, 보고 싶어…." 어쩌고저쩌고 주절주절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대는 인도네시아인이었는데, 지난 일요일(7/31) 쉼터에 개인적인 문제로 상담을 왔던 모하마드 누르(Mochamad Nur)였습니다. 그는 쉼터에서 제가 다른 사람의 상담을 받는 동안 기다리면서 쉼터에 거주하고 있던 보틔이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때 별다른 생각 없이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던 보틔이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매일 전화로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통에 무섭다면서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가 전화기에 대고 "왜 전화를…"이라고 인도네시아어로 말을 시작하자 마자 상대방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핸드폰 수신번호를 확인해 보니, 오후에만 11번이나 전화가 왔었습니다. 전화 와서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보틔이는 "그냥, 몰라요, 무슨 말인지… 자기야… 뭐라고 그래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전화를 받은 보틔이는 한국어가 서툴러 통역이 없으면 제대로 된 대화가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딱 한 번 보았던 남자가 전화로 수도 없이 횡설수설한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상담하러 왔다가 만난 사람에게 스토킹(?)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핸드폰에 찍힌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전화 받는 사람이 싫어하니 다신 전화하지 말 것. 이거 스토킹이야!"이라고 쓴 후 제 인도네시아 이름을 적었습니다. 문자를 받은 누르가 스토킹이 뭔지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얼마 안 있어 "ok bos"라고 간단하게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알았다"는 말이었습니다.


가부장적인 문화권에서 온 남성이주노동자들은 대개 여성에 대한 자신의 의사표현이 '뭐가 잘못이냐'는 자세로 나오기 쉬운데, 이 경우는 쉽게 이해하여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모하마드 누르는 다신 보틔이에게 전화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와 비슷한 일이 한국인 자원 활동가와 이주노동자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그럴 때 처음부터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가 '이것이 아니다' 라는 판단과 함께 감정이 많이 상한 후에야 지원 단체 관계자들에게 사실을 털어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녀관계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보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지만, 이성으로부터의 원치 않는 전화나 문자메시지 등에 대해 방관하면, 일이 커진 후에는 수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답변을 받았지만, 기분이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보틔이가 받은 전화는 사회적 약자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도 같은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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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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