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쏟아지던 밤, 옥수수 하모니카 불다

은하수 사이로 견우와 직녀가 만날 것을 학수고대하더라

등록 2005.08.04 19:59수정 2005.08.05 09:3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밤 하늘 별을 세던 그시절 가버렸어도...아직도 내 가슴에 남았네.

밤 하늘 별을 세던 그시절 가버렸어도...아직도 내 가슴에 남았네. ⓒ 김용철


물리게 먹은 콩잎된장국과 식구들끼리 소리를 들으며 저녁식사


"엄마 또 콩잎된장꾹인가?"
"글도 무시씰가리꾹 보담 낫잖냐."
"맨날 질리지도 않응가? 채라리 호박국이 낫겠구만…."
"언넝 묵어라. 밥 묵을 때 까탈 부리면 장가도 못 간다 글더라. 글면 너 혼차 평생 밥 해묵고 살텨?"

모처럼 부려본 앙탈이었다. 사실 밥상머리에서 깨작거리거나 밥투정을 하면 아버지는 가만 두지 않으셨다. 스스로 먹고 싶을 때까지 밥을 먹이지 않았으니 적당히 하다가 말아야 한다. 호박잎에 조선호박 빗겨 썰어 넣은 호박국이라도 먹어보려는 심산이었다.

일곱 살인 내가 그렇게까지 한데는 대여섯 시에 청한 잠이 해가 서산에 기웃거릴 때 깨어나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을 하지 못해 얼떨떨한 기분에 밥상 앞에 앉았기에 그렇다. 어른들과 형제들은 심술부리는 막내아들을 어떻게든 달래서 얼러보려고 애를 썼다.

사실 콩국은 여름철에 물리도록 먹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몇 망태기를 말렸다가 한 겨울에 무시래기 못지않게 지겹도록 먹었으니 떨떠름한 혀가 거부할 명분도 충분했다. 제철이라지만 까칠까칠하여 목 넘김이 쉽지 않았다. 끓이기 전에 빡빡 문질러 콩잎 잔털을 잦아들게 했지만 내 보드라운 혀를 여전히 성가시게 한다. 간혹 줄기 몇 개도 씹히는 느낌이 영 아니었다.

"알았어. 내일은 쇤 호박 졸여줄텡께 언넝 묵어라."
"누나!"
"엉?"
"거시기 뭐시냐 밥 묵고 깡냉이 삶아줘."
"그려. 긍께 인자 묵자. 냉기지 말고…."


우리도 식구 많은 집이라 옆 사람이 후루룩 먹는 소리에 대충 말아서 덩달아 몇 번 뜨면 금방 밥이 동이 나서 맛없던 밥도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만다.

"탁!"


"아따 이노무 모구새끼가…. 시째야 가서 모굿불 좀 피워라."
"예."
"보릿대 넣고 우게다 생풀을 몽창 올려놔. 그래야 뽀르르 안 탄당께."
"알았어라우. 물도 한바가지 끼얹으끄라우?"
"알아서 혀."

8월 초라 여느 때보다 맑은 날이 며칠 간 이어졌다. 시궁창이고 측간, 외양간, 작은 웅덩이 고인 물에 낮엔 파리가 밤엔 모기가 들끓었다. 아버지는 장독대에 애지중지 심어놓은 봉숭아마저 다 뽑아버리기 일쑤였지만 그걸로 막둥이 아들과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그날따라 오이국, 가지나물, 호박무침도 없는 보잘것없는 저녁이었지만 콩밭 사이사이에 심어서 담근 야들야들한 열무김치가 알맞게 익어 있었다. 어슴푸레 마룻바닥으로 지붕에 반사된 빛이 들어와 밥 몇 술 뜨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옥수수로 하모니카를 불다

형제들은 밥상에서 물러나자 트림을 한번씩 하고는 감나무 밑에 길게 놓인 평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아직 감나무 잎이 미동도 하지 않을 모양으로 고요하다. 외양간에선 암소가 '딸랑딸랑’ 풍경을 흔들어대며 맛나게 풀을 씹고 있다. 뒷발차기와 쇠꼬리채 흔들기가 주특기인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어찌나 잘 먹어대는지 신기하기 그지없다.

"성 오늘은 설탕 넣을 텨?"
"아녀. 그냥 소금만 넣고 삶아야 더 낫더라."
"누나, 난 다섯 개!"
"성아랑 누나는?"
"서너 개씩 묵으면 되지 않겄냐?"
"알았어. 하여튼 난 다섯인께…."

누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밖에 걸어둔 솥단지에 물을 붓고 대접을 엎어 뒀다. 평상에 미리 가 있던 우린 옥수수 껍질만 벗길 뿐 수염은 떼는 둥 마는 둥 손질하는 동안 오늘 당번인 누나가 정지에서 마른나무를 가져다가 불을 때기 시작했다.

자욱이 깔려 있던 모깃불과 옥수수 삶는 연기에 모기가 얼씬도 않는다. 우린 농협에서 나눠 준 부채를 부치며 한가로이 밤을 맞았다.

"오늘이 음력으로 몇 날인가?"
"몰러 엄니한테 물어봐라."
"엄마, 오늘이 음력 며칠이당가?"
"가만있어 봐라. 달도 없는 걸 보니 그믐이나 초하레 쯤 되겄어야."

전기도 없지 집집마다 모기를 불러 모으지 않으려고 일찍 호롱불을 끈 통에 산골 마을은 온통 칠흑이다. 유난히 솥단지 밑에서 피어오르는 불빛이 휘황찬란하다. 벌써 가을로 가는 계절 길목이었던지 귀뚜라미 소리 서너 마리가 번갈아가며 울며 쏘다니고 있는가 보다.

"언제 철렵이나 한번 갔으먼 좋겠다."
"가재랑 찡거미도 잡을까? 이번엔 꼭 나도 델꼬가 알았제?"
"잉."

기억력이 좋지 않은 건지 언제나 나를 빼먹고 가는 형에게 사정해보았지만 그 때 가봐야 안다. 늘 그랬다. 훌쩍 나가서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하는 형이 내내 미웠지만 경찰력을 동원하여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삶아지는 동안 재와 잉그락을 섞어 옥수수 몇 개를 넣었다. 그새 불을 줄여 놓으니 달그락 소리를 내며 고소한 옥수수 냄새가 온 마당에 가득 퍼졌다. 껍질 한 겹만 벗긴 채 불구덩이에 파묻어 놓은 강냉이는 꼬소롬한 내음을 풍긴다. 아마도 겉은 약간 타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밥 묵은 지 얼마 됐다고 벌써 배가 고푸지? 언넝 묵자."
"성, 끄집어 내로 가자."

그 시절 뭔들 맛있지 않았겠는가마는 여름철엔 강원도 강냉이가 있어서 좋았다. 여물이 덜 들어 야들야들 보드라워 이가 없는 어른들도 잇몸으로 먹어도 되었다. 딱딱하지 않은 것 몇 개를 골라 어머니 아버지께 먼저 드렸더니 동생이랑 모기장 안에서 드신다.

한사코 나오겠다는 여동생을 떼어 놓고 평상으로 올라갔다.

"아이쿠!"
"왜?"
"대나무 발 사이에 허벅지가 끼어부렀어."
"긍께 엉덩이로 먼처 앉아야지."

우린 솥단지에 담긴 옥수수 대부분을 소쿠리에 담았다. 옥수수도 먹는 순서가 있는 법. 뜨겁게 구워지면서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재를 털면서 바짝 마른 껍질을 벗겨 토독토독 배가 부른 옥수수 하나씩을 쥐어야 성에 찬다. 고소하고 구수하다. 꼬습기 그지없었다. 입에 숯 검덩이를 몽땅 묻히고 손이 더렵혀진 채 다음 작업으로 들어간다.

각기 몫을 찜해 놓고 손을 요리조리 바삐 계속 움직이며 핥기라도 하듯 토끼처럼 아그작아그작 먹어댔다. 보랏빛 알갱이가 이빨 사이에 끼고 껍질이 성가시게 했지만 알 바 아니다. 청솔모인지 다람쥐인지 모르게 둘둘 돌려 세 개씩 먹었다.

약간 배가 불러오자 하모니카를 분다. 모두 다 빼먹고 한 줄이나 두 줄만 남겨서 손으로 떼어 먹는 풍경이었다. 옆으로 줄줄이 입술을 움직이며 하모니카 부는 흉내를 내면 더 나은 행복은 없는 줄 알았다.

a 맛있는 옥수수 하모니카를 많이도 불었다.

맛있는 옥수수 하모니카를 많이도 불었다. ⓒ 김용철


은하수를 건너지 못하고 칠월칠석을 학수고대하는 한여름 밤 하늘 두 별

한여름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산골이라 찬바람이 휭 하니 한번 살갗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비 안 오겠제?"
"하믄. 하늘 한번 쳐다봐라. 별이 총총, 수백 개가 쏟아질 것 같은디 뭔 비가 온다고 그려?"
"혹 알어 소낙비라도 쏟아질지."
"글도 요 며칠은 안 온다. 칠월칠석날이나 올랑가 모르제."

웃옷을 벗은 채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감나무 잎이 흔들리는 사이로 성탄절 전야처럼 꼬마전구를 수백만 개 매달아 놓은 듯 반짝반짝 빤짝빤짝 공기에 부서진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바닷가 백사장에 모래 알갱이가 햇볕에 그을려 구워진 느낌이다.

남쪽 백아산 마당바위 쪽 전갈자리에서 북쪽 끝 곡성군 방향 도마뱀자리로 이어지는 미리내 은하수는 큰 강이 되어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았다. 통째 긴 강물이 내려앉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별이 대체 몇 개나 된가 세어 볼까?"
"누나도 참…. 그걸 어떻게 다 세?"
"글도 한번 셔보자."
"좋아."

"하나 둘 셋 넷…… 구백구십구 천."
"난 천까지 세고 다시 할 거야."

다 셀 수가 없었다. 형제자매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황홀했다. 정신을 쏙 빼놓고 손톱으로 옥수수 알갱이를 이 사이에서 빼내면서 침을 질질 흐르는 것도 모른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여름 밤 하늘에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여름철에 가장 빛나는 직녀성을 안고 있는 거문고자리와 은하수 건너 왼쪽 독수리자리엔 견우성이 화답하고 있다. 며칠 후 만날 수 있음에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한다. 곧 만나리라 다짐하는 양 손짓하고 있다.

두 사람 위쪽 하늘엔 고니(백조자리)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다. 어찌나 날이 맑고 초롱초롱 하던지 긴 뱀을 양손에 나눠가진 땅꾼도 보였고 헤라클레스와 궁수, 방패, 화살, 돌고래 따위도 고기가 물 만난 듯, 바다나 땅인 듯 천연덕스레 보였다.

도란도란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는 천진한 시골 아이 형제자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멀찌감치 비켜있는 북극성과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를 가졌다. 누나와 셋째형은 각각 직녀와 견우가 되겠다고 했다.

별똥별까지 덤으로 보는 행운

몇 시나 됐을까 귀뚜라미소리 작아지더니 잠을 자러 갔나보다. 그 때였다.

"야~ 쩌기 봐봐."
"어디?"
"백아산 몰랭이에서 평지쪽 말야."

순식간 남쪽 하늘에서 희고 긴 줄이 발갛게 변하더니 지리산 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만다. 그곳은 우리에겐 미지의 땅이었다. 별똥이 떨어진 곳은 이 더운 여름에도 주변을 싹 태우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못 봤는디 또 안 떨어질랑가."
"지달려봐. 별똥별은 떨어지는 날 떨어진당께."

하염없이 목 놓아 기다렸건만 밤 11시 반을 넘길 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었다. 도저히 더 버틸 수 없었다.

"아이구 졸려. 나 들갈래."

덧붙이는 글 | 제 고향 전남 화순 백아산에서 담양 추월산까지가 우리나라에서 별이 가장 잘 보이고 장수벨트가 이어지는 곳입니다. 

더운 날 삽화를 그려준 김용철씨께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제 고향 전남 화순 백아산에서 담양 추월산까지가 우리나라에서 별이 가장 잘 보이고 장수벨트가 이어지는 곳입니다. 

더운 날 삽화를 그려준 김용철씨께 감사드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2. 2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3. 3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4. 4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5. 5 윤 대통령 조롱 문구 유행... 그 와중에 아첨하는 장관 윤 대통령 조롱 문구 유행... 그 와중에 아첨하는 장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