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아름다운 능금이라는 과일을 아시나요?

과일의 제왕이라 불리는 사과의 원조

등록 2005.08.06 18:24수정 2005.08.0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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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능금이란 과일을 아시는지요? 아그배, 문배, 빈대밤, 머루, 다래 등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우리나라 고유의 과실들이 많지만 아마도 능금이란 과일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맛을 가진 과일인지 아는 사람은 좀 드물 겁니다.

요즘 시장에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풋사과를 보면서 문득 어렸을 때 맛보았던 능금이라는 과일이 생각났습니다. 사과의 옛 이름이 능금이랍니다.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사과 궤짝에는 사과라는 말 대신 능금이라는 말이 까만 글씨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야광나무를 개량한 것으로 지름 2~3cm 크기의 붉은 과실이 열리는 꽃사과. 능금과 크기가 비슷하다.
야광나무를 개량한 것으로 지름 2~3cm 크기의 붉은 과실이 열리는 꽃사과. 능금과 크기가 비슷하다.김유자
능금의 옛날 이름은 임금

능금을 모르시니 능금의 옛 이름은 더더욱 모르실테죠? 능금이란 이름은 임금에서 비롯된 말로서 장미과에 속하는 데 학명으로는 Malus asiatica Nakai이며 사과와 같은 속이랍니다.(사과는 M. pumila)

우리나라 고려 시대와 같은 시기의 나라였던 중국 북송(北宋)의 손목이라는 사람이 쓴 <계림유사>라는 책에 '임금(林檎)'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보아 적어도 1천여년 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재배되었을 거라고 추측한답니다.

능금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며 큰 나무는 3~4m까지 자라며 어린가지엔 털이 많다고 합니다. 열매는 3~5cm로 작고 꽃사과보다 약간 큽니다. 복숭아처럼 황색 바탕에 약간 발그스레한 빛이 감돌고 겉엔 포도알 같이 뽀얀 가루가 묻어 있습니다.

맛은 어떠냐고요? 얼마 전까지 시장에 나왔던 홍옥이라는 사과는 기억하시지요? 알이 작지만 유난히 빨간 사과 말이예요. 그 홍옥처럼 새콤하고 떫지만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있답니다.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는 "붉은 임금 주렁주렁 달렸는데/아마도 그 맛은 쓰리다."하여 생김새와 맛까지 짐작할 수 있도록 써놓았답니다.

조선시대에는 능금의 크기가 큰 것은 내(奈), 작은 것은 임금이라고 지칭했다는데 능금을 일컫던 임금 대신 사과(沙果)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16세기부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의 사과는 '내', '임금'등과 더불어 능금을 부르는 하나의 속칭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17세기에 이르러 크고 향기 있고 맛좋은 개량 능금이 중국에서 들어오는데 이 때부터 능금 대신 사과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마치 능금이 사과의 한 품종인듯 인식되었으니 이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지요.

17세기에 편찬된 <남강만록>이란 책에는 "안평대군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사과를 가져와 심으니 이 열매가 매우 크고 신 맛과 떫은 맛이 적어 누구나 사과 한 번 먹어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라고 쓰여 있기도 했으니 얼마나 귀한 과일이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으시지요?

80년대 초에만 해도 아줌마들이 종로에까지 함지박에 능금을 이고 와 팔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멸종 지경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그나마 인왕산 뒤 북악 스카이웨이 올라가는 입구 육교 언덕에 150~200여 년 된 능금이 야생으로서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을 뿐이랍니다.

품종의 통일은 사람의 입맛마저 굳게 만들고 말아

사과만해도 그렇지요. 80년대엔 국광이니 인도(노란 사과)니 홍옥이니 아오리니 후지(부사)등이 골고루 재배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후지사과 일색이지요? 80년대만 해도 사과 상자에는 사과와 능금이 혼용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능금'이란 말이 '사과'라는 말의 대구 사투리인 줄 알았답니다. 초등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거든요. 규격화되고 획일화된 사회를 오래 살아오다 보니 알게 모르게 이런 과일 품종마저 다양성을 상실하는 풍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품종의 통일은 신축적인 가격 조절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사람의 입맛마저 굳어지게 만들고 말 겁니다.

토종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 삶의 시원을 찾는 일

능금 따위 말고도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지천으로 갈려 있는데, 그 까짓 사라져가는 과일은 뭐하러 들먹이느냐고요?

저는 멀리보면 토종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 삶의 시원을 찾는 일과도 결부돼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아마 먹는 일보다 인간 존재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일은 흔치 않을 겁니다.

우리 조상들이 뭘 먹고 살았느냐는 것은 내 존재의 내력을 아는 것이지요. 우리 기억은 능금이란 과일을 잊었을는지 몰라도 우리 유전자는 능금을 베어 물던 새큼한 맛을 알고 있을 겁니다.

이제부터 식구들끼리 빙 둘러앉아서 사과를 드실 때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능금 이야기 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애야, 옛날 옛적에는 때는 사과의 이름이 능금이었다는구나, 이름 참 이쁘기도 하지?"

어때요? 따분하던 삶이 갑자기 신화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신비스러워질 것 같지 않으시나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쓰는데는 농민신문사에서 나온 김용덕 저 <이 땅의 토박이동식물 토종>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쓰는데는 농민신문사에서 나온 김용덕 저 <이 땅의 토박이동식물 토종>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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