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의 숫자는 곧 죽은 시간의 묶음이었다

[서평] 때늦은 깨달음 전해준 어린 공주 <모모>

등록 2005.08.09 19:12수정 2005.08.0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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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 비룡소

군대에 간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쇼핑 목록을 챙겨 마트로 갔다. 오랜만에 딸아이와 같이 시장보기를 하니 참 행복했다. 그 동안 공부때문에 밤낮 구분이 없이 올빼미 생활을 했던 딸은 몇 년 만에 같이 간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더니 책방에서 <모모>(미하엘 엔데 지음/한미희 옮김/비룡소)를 들고 나왔다.

<모모>는 20여년 전 처녀 시절에 사서 읽은 것 같은데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고 <어린 왕자>류의 책이라고 각인이 되어있었다.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 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였는데, 처녀 시절에는 주경야독을 하던 때라 다소 몽상적인 <모모>의 이야기에 감동을 못했었다.


그 때 나는 시간과 싸움하듯 바쁘게 살고 있었으므로 이미 시간 도둑인 회색신사에게 붙잡혀 있던 셈이었다. 그 때 좀더 진지하게 모모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 책을 다시 보는 일은 없었을까?

모모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녀의 관심이 필요한 대상을 위해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들어주는 탁월한 능력으로 관광 안내원 기롤라모와 도로 청소부 베포를 비롯하여 꼬마 친구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들에게 회색신사가 찾아오기 전까지 평온을 유지하며 행복이 무엇인지 따져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시간 도둑인 회색 신사는 모모의 친구들에게 접근하여 "시간을 아끼면 곱절의 시간을 벌 수 있다. 시간을 아끼면 미래가 보인다"며 주어진 모든 삶에서 시간을 아낄 것을 종용한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도, 사랑을 나누는 일조차도 시간의 적이라며 사람들을 달리게 만든다.

회색 신사들의 얼굴은 모두 잿빛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시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 간다. 회색 신사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낀 시간이 저축되어 있다고 착각한다.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모모는 회색신사들을 없애기 위해 시간의 꽃을 찾아가는 모험을 시작한다. 어쩌면 회색 신사는 물질문명의 소산물이고 내 안에 있는 모습이며,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려온 내 모습이 거기 있었다.


통장의 숫자는 곧 나의 죽은 시간의 묶음이란 걸 깨닫는 순간, 나는 한없이 울었다. 우리 두 아이를 위해 놀아주지도 못하고 '사람을 담아두는 창고(아파트)' 한칸을 얻기 위해 여유도 잊고 영원히 살 것처럼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모모.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은 삶이 아니며, 내가 얻은 것은 약간의 돈과 일자리이지만, 잃은 것은 시간과 삶이며, 내 친구들과 가족들은 '또 다른 나의 모모'였다는 슬픈 깨달음을 이렇게 늦은 나이에 알게 되다니!


모모는 회색 신사들로부터 빼앗긴 친구들과 시간을 찾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시간의 진원지를 찾아 호라 박사를 찾아간다. 판타지 소설같은 전개 속에 아슬아슬한 성공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작가 미하엘 엔데는 실감나게 보여준다.

'같이 한 시간만큼만 그리움이 남는다'는 것, 누군가를 앞지르고 뭔가를 이루려는 마음 속에 이미 회색 신사가 주인 노릇을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속삭임은 바쁘게 살아가느라 따뜻함을 잃고 삭막하게 기계들과 살아가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한 순간 한 순간의 과정을 즐기며 목표에 이르는 길, 그러면서도 회색 신사에게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지를…, 숙제로 남겨 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이상부터 읽어도 된다는 암시에 손쉽게 읽어낼 수 있으나,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아닌 어른이며, 남들보다 더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아닐까? 아이들은 이미 놀이의 천재이고 그들 스스로 '모모'이기 때문이다. 어서 방학이 끝나서 우리 반 다섯 명의 모모들과 행복한 시간을 만들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부제를 붙여도 좋을 듯한 책. 달리는 길에 가끔은 읽어봐도 좋을 듯 하여 일독을 권합니다. 이 글은 <웹진에세이>와 <한국교육신문>에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부제를 붙여도 좋을 듯한 책. 달리는 길에 가끔은 읽어봐도 좋을 듯 하여 일독을 권합니다. 이 글은 <웹진에세이>와 <한국교육신문>에 실었습니다.

모모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비룡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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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없다>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쉽게 살까 오래 살까>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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