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에서 느낀 장모님에 대한 애틋함

등록 2005.08.11 19:09수정 2005.08.1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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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수
오늘(11일) 오후 잠시 짬을 내어 회사 근처 할인점에서 자그마한 카세트를 샀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우체국에서 택배로 시골에 계신 어머님에게 보내드렸습니다.


퇴근하면서 어머님께 전화를 드려 "휴가 때 말씀하신 라디오 보냈어요. 택배직원이 전화할 거니까 휴대전화 울리면 잘 받으세요"라고 말씀드리니, 별것도 아닌 것에 두 번씩이나 "고맙네"라고 하셔서 제가 더 민망했습니다. 그동안 맘껏 효도해 드리지 못한 것이 더욱 죄송해서였을 것입니다.

이번 여름휴가를 처형네 식구들과 함께 처갓집에서 보냈는데, 논밭에서 일하실 때 혼자 심심하시니 들고 다니며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보내 드린 것이지요.

유영수
사실 저는 여름휴가를 처갓집으로 가자는 집사람의 말에 반대했습니다. 기껏 여기저기 가볼만한 곳의 정보를 수집해서 갈 곳을 정해 놨는데, 느닷없이 처갓집으로 행선지를 변경하니 그럴 수밖에요.

요즘 그 좋아하는 사진을 못 찍어서 이번 여름휴가 때나 한 번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좋은 작품 하나 건질까 잔뜩 기대를 했거든요. 그런데 시골에 가면 특별히 경치 좋은 곳이 없으니 당연히 내키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처갓집 식구들하고 워낙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 며칠 동안 같이 지내도 특별히 불편하고 그렇진 않지만, 시골에 내려가면 제가 하기 싫어하는 농사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농사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도통 없는 데다, 늘 펜대나 굴리며 편하게 일하다 보니 거칠고 힘든 농사일은 전혀 체질에 맞지 않아 불편할 수밖에요.

유영수
그렇다고 3년 전에 갑작스레 아버님을 여의시고 홀로 그 힘든 농사일을 다 해내시는 어머님을 안 도와드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2박4일 일정으로 시골로 향하게 됐습니다.


시골에 새벽에 도착해 첫날은 할 일이 많다며 싫다고 하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지리산 인근의 'OOO 온천랜드'로 하루 일정으로 간단한 피서를 떠났습니다. 휴가를 떠나기 전 처갓집이 있는 남원시 근처의 괜찮은 관광명소를 찾다 마땅한 게 없어, 그래도 제일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선택한 것이지요.

출발하기 전 어머님에게 온천랜드 이름을 대며 혹시 가보신 데 아니냐고 여쭸지만,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며 "내가 웬만한 덴 다 다녀봤는데…"하시더군요. 시골에서는 농한기 때 마을어르신들이 단체로 관광을 많이 다니시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요.

어쨌든 어머님과 처형네 식구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우리는 구례를 거쳐 문제의 온천에 도착했습니다. 노천온천과 수영장을 갖춘 관광호텔로 인터넷을 통해 홈페이지에서 본 사진은 꽤 그럴 듯했거든요.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관광호텔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허름한 숙박시설 옆에 부대시설로 딸려 있는 온천은, 서울에 있는 괜찮은 찜질방과 별반 다를 것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어머님이 올해에만 두 번이나 오셨던 곳이라는군요. 단체관광을 다녀오실 때 꼭 여기에 들려 온천을 즐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김새더군요. 제딴에는 신경써서 선택해 효도 한 번 하겠다며 모시고 간 곳인데 말이죠.

신통치 않았던 온천 내 분수대 앞에서 포즈를 취하신 어머님의 모습
신통치 않았던 온천 내 분수대 앞에서 포즈를 취하신 어머님의 모습유영수
여하튼 입장권을 끊어 내부로 들어가니 락카며 수영장 시설하며 참 기가 막힐 정도로 낡아 있더군요. 궁금한 걸 못 참는 제가 직원에게 물어보니 1980년도에 지은 시설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최고의 시설이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통치 않아 하시는 어머님껜 죄송했지만 어쨌거나 돈 내고 들어왔으니 수영이라도 열심히 하고 가야겠다 싶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마지막에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시골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님은 고추를 따야 한다며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손위 형님과 저에게 채근을 하십니다. 우리가 늦잠을 자는 사이 어머님은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벌써 한참 일을 하고 오신 듯합니다.

경운기 대용으로 짐을 나를 때나 옆 마을에 사시는 처외할머님을 찾아 뵐 때 요긴하게 쓰이는 오토바이
경운기 대용으로 짐을 나를 때나 옆 마을에 사시는 처외할머님을 찾아 뵐 때 요긴하게 쓰이는 오토바이유영수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입니다. 제가 잘하고 신나서 하는 일이야 좀 힘들어도 참고 하겠지만, 잘하지도 못하고 별반 재미도 없는 것을 하자니 고역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지요.

집 바로 옆에 있는 밭에 잘 매달려 있는 고추를 따고 계신 어머님께 다가갔습니다. 힘드니까 고추 따는 일은 하지 말고 고추를 따서 넣고 다니는 푸댓자루나 옮겨 달라고 어머님은 말씀하시지만, 어떻게 눈 앞에서 고생하시는 걸 보면서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작된 고추따기.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태양빛은 서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습니다. 주변에 건물들이 별로 없고 산이 많아 시골집은 서울의 아파트보다 훨씬 시원했지만, 반대로 논이나 밭의 온도는 서울의 무더위는 저리 가라였습니다.

딱 두 시간 정도만 일했을 뿐인데 제 팔과 목은 해수욕장에서 썬크림 안 바르고 한나절 내내 선탠한 사람처럼 까매졌지요. 그뿐이겠습니까. 유독 땀이 많은 저는 전날 간혹 찾는 찜질방의 불가마에서 흘린 땀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더위를 먹은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힘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여자 혼자 다 해내신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땡볕에서 일하느라 고생스럽고 지치긴 했지만, 남자 없이 혼자서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님의 처지를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조금이지만 어머님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됐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구요.

유영수
계획대로 실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매년 여름휴가를 처갓집에서 보내며 혼자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도와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평상시엔 바쁘게 일하시느라 그리고 혼자 먹는 밥맛이 뭐가 좋겠느냐며 식사도 제대로 안 챙겨 드시는 어머님에게, 대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식사시간도 행복하게 느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3년 전 아버님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저를 부르셨던 일이 기억납니다. 제 손을 잡으시며 "둘이 싸우지 말고 잘 살아야 하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홀연 세상을 등지신 아버님이셨습니다.

유언으로 부탁하셨음에도 지금도 매일 티격태격하고 살고 있지만, 이제 아버님의 그 큰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메워드릴 수 있는 아들같은 사위가 돼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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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고 대자연을 누리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평생 살다 제주에서 1년 반,포항에서 3년 반 동안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대자연 속에서 깊은 치유의 경험을 했습니다. 인생 후반부에 소명으로 받은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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