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급에 든 '남 탓하기'

등록 2005.08.14 00:43수정 2005.08.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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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진짜 저게 무슨 쓸데없는 인력 낭비라냐."


얼마 전 집 근처 모 대형 할인 마트에 갔을 때 든 생각이었다. 쇼핑 카트를 빼는 곳에 직원이 있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가는 사람이야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저 옆에 사람 하는 것처럼 동전 하나 넣고 빼가면 그만인데 그게 뭐 어렵다고 안내하는 직원까지 세워놓았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은 장을 다 보고 난 후 '야 안내 게시판도 없고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라는 생각으로 급격한 반전을 겪었다(장을 늦게 보러 가기에 입장시에는 직원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본 후에는 그 곳에 직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을 다 본 후 쇼핑 카트를 넣고서 다시 백원을 빼내려고 하는데 쇼핑 카트가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들어가는 것이었다. 급기야 거짓말 조금 보태 젖먹던 힘까지 다 써서 쇼핑 카트를 밀어넣었거만 90%정도만 들어가고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서서히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왜 이럴까?'를 한참 고민하며 쇼핑 카트를 자세히 살펴보자 손잡이 부분 줄무늬 색깔이 두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빨간색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파란 색이었다. '혹시?' 순간적으로 색깔에 따라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힘겹게 집어 넣은 쇼핑 카트를 다시 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빨간 색은 빨간 색 줄무늬에, 파란 색은 파란 색 줄무늬에 넣어야 한다.
빨간 색은 빨간 색 줄무늬에, 파란 색은 파란 색 줄무늬에 넣어야 한다.양중모
그런데 이 쇼핑 카트가 들어갈 때보다 더 힘을 쓰고 용을 쓰도 도무지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주차 안내 요원을 하던 남자 직원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려는 순간 그 직원은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해갔다. 그리고 대신 내 눈 앞으로 아주머니처럼 보이는 직원이 지나갔다.


그러나 난 바로 '도와주세요'라고 외치지 못하고 '아, 그래도 남자인데, 힘 쓰는 일에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나. 아니야. 직원이니까 뭔가 노하우가 있을지도 몰라' 하며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그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백년 천년이고 계속 그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저절로 '도와주세요'라는 목소리가 밖으로 나왔다.

"아, 이거 여기다 하시면 안되는데. 색깔별로 넣어야 하는건데."
"안내 설명문이라도 붙여 놓아야죠!"


그제서야 나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안내하는 사람들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존심을 접고, 도움을 청했거늘, 그 직원이 핀잔을 주자 난 바로 발끈하여 열심히 같이 카트기를 빼고 있는 직원에게 한마디를 쏘아 붙였다. 우리 어머니 정도는 안되어도 고모뻘 정도는 될텐데 좀 날카롭게 말한 것이 미안하기는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직원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같이 낑낑대다가 나보고 '빼내라'고 하고, 자기는 뒤에서 틈을 만들어 드디어 빼내는데 성공했다. 직원에게 좀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쇼핑 카트를 다시 넣어놓아야 100원이 나오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13일) 같은 장소를 방문했다가 스스로 두 번 실망하는 일을 겪었다. 첫번째 실망감은 나의 쪼잔함에 관한 것이었다. 나처럼 초록색 줄무늬 손잡이 카트를 몰던 사람인지, 파란색 줄무늬 손잡이가 있는 카트에 넣으려다 실패했는지, 그냥 100원을 꽂아놓은 채로 가버린 것이다. 아 정말 부러웠다. 100원에 초연할 수 있는 모습이라니.

나와 같은 경우를 겪었는지, 그냥 백원을 버리고 간 사람.
나와 같은 경우를 겪었는지, 그냥 백원을 버리고 간 사람.양중모
두번째 실망감은 내가 너무 쪼잔했나라는 생각이 들 무렵 멍청함을 깨달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의기양양하게 색깔 맞추어 넣었는데 옆에 있던 할머니도 나와 똑같은 경우를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안타까운지고'라는 심정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가 친절히 설명해주려고 하는 순간, 그 할머니는 다가오는 사람에게 재빨리 '이거 쓰세요'라고 말하고는 그 사람에게 100원을 받고서 유유히 사라졌다. 어째서, 정말 왜 어째서 난 지난번에 그런 당연하고도 쉬운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고 낑낑대며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던 것일까.

'안내문 하나 안 붙여놓아서지'라고 그 마트를 마음 속으로 실컷 욕했지만,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곳에 직원이 있다고 비웃었던 게 누구던가. 사람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간사해서 자기에게 불리해지면 금방이고 그렇게 돌변해 화낼 수 있다는 것을 내 자신 스스로 증명해보인 셈이다.

자신에게 한없는 실망을 느낀 와중에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가지 위안이 되었던 사실은 내가 색맹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색맹이었다면 그런 구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정말로 바보처럼 하루 종일 넣었다 빼내었다를 반복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개똥도 약에 쓰려면 귀하다는데, 하물며 장사하는 기업에게 직원들이 손님들 욕구에 맞추어 적시적소에 배치되는 것이 중요한 것을 두말할 필요있으랴. 물론 이번 경우에 그 마트에 전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사려깊지 못함에 더 큰 책임을 돌리기로 했다.

물론 그 업체측에서 내 마음을 알 리는 없겠지만, 바보같다고 욕하다가, 내게 불리한 상황이 오자, 그 바보 같은 상황을 왜 유지하지 않느냐고 묻기는 좀 치사하지 않은가. 시민기자 활동을 하면서 원래부터 잘하기는 했지만 남 탓하는 거 이제 거의 프로급에 들었다. 원래부터 서툴었던 내 탓이요는 이제는 아주 가장 낮은 수준에 도달했나 보다.

그렇긴 하지만 조만간 그 업체에 건의 전화 한 통을 넣을 생각이다. 늦은 시간에 안내 직원을 배치하기가 힘들다면, 다른 대안을 생각해달라고 말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같은 불편을 겪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그러고보면 시민기자 하면서 내 불편함을 남도 느끼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원래 생각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불편을 남 탓으로 돌리는데만 익숙해졌나 보다. 이번일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비판만 할 줄 알고 대안은 제시할 줄 모르는, 그런 인간이 되지 말자.

덧붙이는 글 | 물론 업체가 잘못한 게 있으면 개선해달라고 요구해야겠지요. 하지만 평상시에는 쓸데없다고 생각했으면서, 자기 필요할 때 없다고 생떼 부리자니 다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네요. 어찌되었든 고쳐달라고 전화는 할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물론 업체가 잘못한 게 있으면 개선해달라고 요구해야겠지요. 하지만 평상시에는 쓸데없다고 생각했으면서, 자기 필요할 때 없다고 생떼 부리자니 다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네요. 어찌되었든 고쳐달라고 전화는 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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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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