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도둑, 밥도둑 하는데 이것이 진짜 ‘밥도둑’

등록 2005.08.15 15:20수정 2005.08.1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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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좋겠다. 놀러 가고’


홍성 IC를 빠져 나오면서 안면도로 향하는 수많은 차량 행렬을 보면서 무심결에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저도 지금 저 사람들처럼 어디론가 피서를 떠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 논에 벼멸구가 심할 때라 농약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에 놀러 가는 것은 다음에 미루고 지금 시골로 농약을 하러 갑니다.

차 뒷좌석에는 잔뜩 삐진 세린이가 타고 있습니다. 여름휴가 때 바닷가에 가자는 꽤 오래전의 약속을 아직도 용케 기억하고 있는 세린이. 병원에 입원한 자기 때문에 못 간 것은 생각 안하고 아빠가 자꾸만 바닷가에 안 간다며 조르는 세린이에게 주말에 바닷가에 가자고 약속했는데, 이렇게 농약을 하러 시골에 가니 저렇게 삐져 있는 겁니다.

할머니 집에 가서 옥수수도 먹고, 음매소도 보고, 멍멍이도 보고, 고추도 따고, 버섯도 따고, 물고기도 잡고 신나게 놀자고 달래보지만 많이 서운한 지 아무 대답이 없네요. 하지만 놀러 가는 것이야 언제든지 놀러 갈 수 있지만 한 번 때를 놓치면 1년 농사를 망치니 아이가 저리 삐져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a 오후 5시쯤 시골집에 도착하니 벌써 농약 준비를 마치신 아버지.

오후 5시쯤 시골집에 도착하니 벌써 농약 준비를 마치신 아버지. ⓒ 장희용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경운기를 끌고 논으로 향합니다. 늦은 오후라 해도 무척 습하고 덥습니다. 더구나 농약이 몸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우비를 입었으니 바람도 안 통하고, 아직 일은 시작도 안했건만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흐릅니다.

2시간 남짓 농약을 다 하고 곧바로 산 밑 고추밭으로 향합니다. 이번에는 고추를 따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엊그제 따서 별로 딸 게 별로 없다면서 집에 가서 씻고 쉬라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고추 따기가 제일 싫거든요. 순간 마음속에는 못 이기는 척 아버지 말대로 할 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 그럴 수 있나요?


밭에서 올라오는 후텁지근한 열기에 땀이 비 오듯 합니다. 온 몸이 끈적거립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며 허리 등이 아파옵니다. 산 밑 고추밭은 고추나무가 큰 탓에 서로 엉겨 붙어 고추 터널을 이루고 있어 일어서서 못 따고 이렇게 허리를 숙인 채 고추나무 밑에서 오리걸음으로 따야 하니 다른 고추밭보다 고생이 두 배입니다.

자꾸만 ‘얼마나 남았나?’하면서 고추 가지를 헤집고 일어서서는 고추밭을 봅니다. 아직도 멀었습니다. 고추 따기가 싫어집니다. 제가 한 고랑 따는 동안 어머니는 벌써 세 번째 고랑에 들어서는 어머니 모습이 보입니다.


문득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이 생깁니다. 허리가 아프셔서 늘 허리보호대를 차고 계시는 어머니, 다리가 아프셔서 이제는 시장조차 못 가시는 어머니인데 젊은 것이 뭐 그리 힘들다고. 열심히 고추를 땄습니다. 그 때부터는 어머니만큼은 아니어도 아마 아버지보다는 제가 더 빨리 고추를 땄을 겁니다.

a 수확한 고추는 이렇게 비닐하우스에서 말립니다.

수확한 고추는 이렇게 비닐하우스에서 말립니다. ⓒ 장희용

그날 고추를 두 포대 땄습니다. 아버지가 지겠다는 것을 빼앗다시피 해 지게를 집니다. 아버지는 ‘니가 그걸 어떻게 지냐’면서 경운기 시동이나 켜라고 했지만 ‘아버지도 하는데 설마 그것도 못 지랴’하면서 제가 진다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근데요, 어휴! 그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무리 일어서려고 힘을 주어도 이놈의 지게가 꿈쩍도 안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뒤에서 보고 있지, 못 일어나면 이게 웬 창피겠습니까? 진짜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주어서 겨우 지게가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이젠 지게가 흔들거리면서 옆으로 넘어지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게 힘으로 되는 줄 아냐’면서 비켜서라고 하십니다. 괜히 머쓱해지더군요.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경운기 있는 쪽으로 가는 동안 괜히 창피한 마음에 남아 있는 한 포대를 제가 옮길까 해서 어깨에 짊어지려고 해 보았지만 그것마저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두 포대 모두 지게로 경운기 있는 곳까지 옮겼습니다.

집에 와서 비닐하우스에 고추를 펼쳐 놓은 것으로 오늘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손을 툭툭 텁니다. ‘휴~’하고 큰 숨을 내쉽니다. ‘이제 다 끝났다’는 즐거움, 누구나 그렇지만 이럴 때 정말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중간에 하기 싫어 요령을 피우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이지만 부모님의 힘듦을 덜어 주었다는 뿌듯함도 밀려오면서 한 낮의 고달픔이 행복함으로 바뀝니다.

a ‘뜨악! 콩이네’ 자기가 밥 푸겠다고 가더니 싫어하는 콩을 보고는. 하지만 그날 세린이는 ‘밥도둑’ 때문인지 콩도 잘 먹었습니다.

‘뜨악! 콩이네’ 자기가 밥 푸겠다고 가더니 싫어하는 콩을 보고는. 하지만 그날 세린이는 ‘밥도둑’ 때문인지 콩도 잘 먹었습니다. ⓒ 장희용

자,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녁을 먹을 시간입니다. 세린이는 아까부터 배가 고프다고 빨리 밥 달라고 할머니를 조릅니다. 하긴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으니 배가 고프기도 할 겁니다. 사실 저도 일해서 그런지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저도 배고프다면서 빨리 밥 달라고 합니다.

‘탁탁탁’ 부엌에서 어머니는 뭔가를 하고 계십니다. 아까 고추를 따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얼큰한 된장찌개를 끓이시는 모양입니다. 드디어 어머니가 조그만 쟁반에 반찬을 가지고 오시더니 상을 차리십니다.

‘이잉~ 이게 뭐야?’

반찬은 양념한 새우젓과 김치, 그리고 미역국이 전부입니다. 그럼 아까 그 소리는 무슨 소리? 된장찌개를 끓이는 줄 알았던 그 소리는 알고 보니 새우젓에 넣을 고추를 칼로 잘게 두드리는 소리였습니다.

어머니는 미역국을 뜨면서 연신 ‘반찬이 아무 것도 없다’면서 괜히 미안해 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반찬을 처음 딱 보는 순간에는 ‘이게 다야?’하는 서운함이 들긴 했습니다. 세린이 녀석은 눈치도 없이 할머니 더 미안하게 ‘뭐 먹을 거 없나?’하면서 상 위를 뚫어져라 쳐다보더군요.


a 어머니는 ‘반찬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지만 반찬이 무슨 상관입니까? 이렇게 마당에 돗자리 깔아 놓고 밤하늘 보면서 먹는 밥, 진짜 맛있습니다.

어머니는 ‘반찬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지만 반찬이 무슨 상관입니까? 이렇게 마당에 돗자리 깔아 놓고 밤하늘 보면서 먹는 밥, 진짜 맛있습니다. ⓒ 장희용

하지만 저는 그 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물론 세린이도 잘 먹고요. 역시 땀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고 난 이후에 먹는 밥이 제일 맛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고향의 밤하늘 아래 집 마당에 돗자리 펴 놓고 시원한 바람 느끼면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딸과 함께 오순도순 함께 먹는 저녁을 먹으니 그 맛을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저기, 사진에서 아버지 밥그릇 보이시죠? 일명 대접이라고 부르는 그릇. 저 그릇에다 두 그릇 먹었습니다. 저나 세린이도 밥을 많이 먹었지만 아버지 어머니도 그 날 정말로 맛있게 드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희 아버지도 저 양이면 평소에 두 배 식사량인데,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과 손녀가 아마 밥도둑이었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맛을 살리는 특별한 음식이 있어 그것을 ‘밥도둑’이라고 부르던 데, 땀과 고향, 그리고 어머니라는 세 단어가 녹아 있는 이 새우젓과 김치가 전부인 저녁상보다 더 맛있는 밥도둑 있는 밥상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그래!

a 저녁을 먹고 난 후 돗자리 깔고 길 가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와 세린이. 낮에 딴 옥수수를 먹으면서 밥 늦도록 재밌게 놀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돗자리 깔고 길 가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와 세린이. 낮에 딴 옥수수를 먹으면서 밥 늦도록 재밌게 놀았습니다. ⓒ 장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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