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통미꾸라지로 만든 추어탕이 어때서?

그 옛날, '체'로 미꾸라지 잡던 비오는 날의 추억

등록 2005.08.19 15:23수정 2005.08.24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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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궂이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 비가 오면 무턱대고 나가 첨벙거리며 놀다 옷도 버리고 불어난 도랑물을 건너다 신발을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억수로 비가 쏟아지다 잠시 그친 틈을 타서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산허리까지 내려 온 먹구름을 보며 몇 바퀴쯤 돌면 비가 쏟아질까가 늘 궁금했었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다보니 바깥 날씨에 둔감하다. 하긴 둔감하고 무심한 것이 어디 날씨 뿐이랴마는. 우산도 없이 밖을 나섰더니 수직의 빗줄기가 아스팔트 표면에 내리꽂히고 있다. 투명한 빗줄기는 표면에 수 없는 왕관을 만들고 있다.

그 옛날 뭐니 뭐니 해도 비 오는 날 최고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날궂이는 체를 이용한 물고기 잡기였다. 황토빛 흙탕물 도랑 폭이 좁은 곳에 동생은 체로 길목을 지키고 나는 온 몸의 신경을 발끝에 모아 수초 속을 차곡차곡 훑었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잠시 몸을 숨겼던 미꾸라지를 비롯한 물고기들이 비록 한두 마리긴 했지만 언제나 체에 걸려 나왔다.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던 진흙덩이의 기분 좋은 간질거림. 은빛 비늘로 온몸을 감싼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노란 양은 주전자에 담으며 비가 오는 것도 잊은 채, 도랑에서 장마철 여름을 보냈었다.

엄마는 딸들이 잡아온 몇 마리 되지 않는 물고기로 늘 매운탕을 끓여주셨다. 운이 좋은 날엔 동네 어른 누군가가 바닥이 드러난 꼬마들의 주전자에 미꾸라지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를 썰어놓고 국물이 별로 없는 조림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한 요리였다. 붕어든 미꾸라지든 내장만 꺼내 그대로 형태를 유지한 채 빨갛게 졸였다.

그 시절엔 무엇이든 다 먹었다. 토끼, 염소, 거위, 메뚜기 하물며 개구리까지... 아무것이나 먹을 줄 아는 내 식습관은 데이트를 하는데 엄청난 방해요인이었다.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적당히 내숭을 떨며 병아리 모이만큼 음식을 찍어먹는 것은 절대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고난이도의 과제였다.

민물매운탕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추어탕을 먹을 줄 아는가 모르는가 확인할 틈도 없이 만난 지 채 백일도 되지 않아 우리는 결혼을 해 버렸다. 추어탕 근처에는 젓가락도 안가는 남편은 추어탕을, 그것도 갈지 않아 형태가 그대로 드러난 징그러운 미꾸라지를 즐기는 나에게 속아서 결혼했다고 언제나 구박이다.


30년 가까이 집에서 엄마가 해준 추어탕만 먹다가 밖에서 처음 먹은 추어탕은 내게 의문투성이였다. 추어탕에 미꾸라지가 한 마리도 없었다. 서울식으로 미꾸라지를 갈아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에 징그러운(?) 형태의 미꾸라지가 들어앉아 있으면 음식을 먹는데 방해가 되어 좀 그렇다는 것이다. 주위 추어탕을 즐기는 이들과 이야기를 해 봤지만 꿈틀꿈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통추어탕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추어탕을 먹을 때마다 늘 생생한 미꾸라지가 그리웠다. 텃밭에서 따온 깻잎과 풋고추를 숭숭 썰어 넣고 탱탱한 미꾸라지가 그대로 들어있는 국물이, 텁텁하지 않은 맑은 매운탕 말이다. 대부분의 추어탕 집에 가면 물을 것도 없이 미꾸라지를 갈아서 국물을 낸 시래기가 들어간 추어탕을 한 뚝배기씩 가져다준다. 통미꾸라지가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갈아 만든 것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a 국물이 거의 없었던 엄마의 추어탕과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통미꾸라지가 들어있다.

국물이 거의 없었던 엄마의 추어탕과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통미꾸라지가 들어있다. ⓒ 이승열


a 요렇게 미꾸라지가 보여야 비로소 추어탕이란 느낌이 든다. 갈은 것은 영 추어탕이 느낌이 나지 않는다.

요렇게 미꾸라지가 보여야 비로소 추어탕이란 느낌이 든다. 갈은 것은 영 추어탕이 느낌이 나지 않는다. ⓒ 이승열


그래도 언제나 통미꾸라지에 싱싱한 제 철 야채, 깻잎과 미나리가 듬뿍 들어간 추어탕이 그리웠다. 엄마의 손맛이, 어린시절 흙탕물이 흐르는 도랑가 수초를 훑던 추억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푸른 호수를 지나야 닿는 양평군 양서면 철길 아래 20년쯤 된 오래된 추어탕 집이 있다. 지나치기만 할 뿐 몇 년째 들어가 본적이 없는 곳이다.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추어탕을 시켰는데 아주머니가 "갈아서요, 통째로요"하고 되묻는다.

세상에 이렇게 가까운 곳을 두고 10년 넘게 갈아 만든 텁텁한 추어탕만 줄곧 먹은 것이 억울하고 안타깝다. 전골냄비 속이 궁금하여 뚜껑을 살짝 열었더니 열기에 한껏 달아오른 미꾸라지들이 냄비 밖으로 반을 탈출해 버렸다. 아주머니가 급히 와서 사태를 수습한다. 다 끓을 때까지 절대 열면 안 된다고 했다. 통미꾸라지에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호기롭게 도전했던 친구는 도저히 미꾸라지를 건지지 못하고 국물과 야채만 열심히 먹는다.

a 요 장면에서 사람들은 거의 경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한다.

요 장면에서 사람들은 거의 경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한다. ⓒ 이승열


얼굴이 보이는 생선 매운탕을 저어한다는 배지영 기자의 기사를 보고 내가 조금 이상한가를 생각해봤다. 좀 이상하긴 하다. 난 통미꾸라지가 들어 있어야 추어탕으로 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하얀 쌀밥에 얹어 먹어야 잘 먹었다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나뿐만 아니고 우리 집 딸들 모두 다 똑같다. 처갓집에 가면 추어탕을 아예 먹지 못하는 사위들은 처음엔 너무 기가 막혀 말도 못하고 멍하니 추어탕 삼매경에 빠진 마누라들을 바라만 본다.

지치지도 않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미꾸라지를 잡다가 밑동이 빠진 체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가 겁이 났던 비 오는 날의 풍경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무래도 날굿이를 하러 나가야할 것 같다. 산성비 때문에 머리가 빠질 염려도, 흙탕물에 얼룩이 질 옷에 대한 염려도 잠시 접어두고, 막바지 여름 황토빛 흙탕물을 만나러 가야겠다. 그 많던 미꾸라지들이 오늘도 거센 물살을 피해 수초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감상일까.

덧붙이는 글 | '날구지'인가 '날궂이'인가 정확히 확인하려고 국어사전을 열심히 찾았으나 없는 단어입니다. 흔히 쓰던 말인데 사전에 없는것을 보니 우리 고향에서만 쓰던 말인가도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날구지'인가 '날궂이'인가 정확히 확인하려고 국어사전을 열심히 찾았으나 없는 단어입니다. 흔히 쓰던 말인데 사전에 없는것을 보니 우리 고향에서만 쓰던 말인가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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