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남미>민음사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와 함께 국내에서 가장 사랑 받고 있는 일본 작가 중에 한명인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우수에 젖은 듯 무겁고 진지하면서도 딴에는 가볍고 경쾌한 문체를 통해, 에쿠니 가오리는 섬세한 심리묘사와 깔끔한 내용전개를 통해 우리의 심금을 자극한다면, 요시모토 바나나는 어찌보면 그들에 비해 가벼운 소품과도 같은, 하지만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듯한 감성적이고 친밀감 넘치는 표현으로 단숨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감수성 넘치는 베스트셀러 작가라 할 수 있다.
하루키와 가오리를 각각 끝없이 물결치는 검푸른 바다와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에 비유한다면, 바나나는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며 흘러내리는 강이라 칭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이러한 바나나가 펼쳐내는 새로운 감각의 여행소설집 <불륜과 남미>가 오랜 기다림 끝에 출간되었다. 표지 그림과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남미의 파리'라 불리는 탱고의 본고장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시작해 와인의 도시 멘도사를 거쳐 이과수 폭포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빚어낸 7편의 주옥같은 단편들이 남미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화려하고 관능적인 색채를 듬뿍 머금은 채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불륜'이라니? 실제 남녀의 그런 관계를 지칭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경험, 바로 남미의 낯선 나라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바나나가 몸으로 느낀 열정적이고 짜릿한 경험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나나라는 애칭만큼이나 그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참으로 기발하고 발칙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아르헨티나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여행한 나처럼 아르헨티나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어쩌다 같은 장소에 들렀을 때, '아, 그 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이쯤에 있으려나'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작가의 말에서
바나나의 바람과도 같이 독자들 또한 이 특별한 아르헨티나 여행을 통해 그녀가 느낀 발칙한 경험, 불륜 속으로 시나브로 빠져들 수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과 쉽게 동화될 수 있다는 장점과 아르헨티나로 여행하고픈 충동을 억누르기가 벅찰 만큼 힘이 든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공존할 만큼, 바나나의 의도는 100% 적중.
이는 일반적인 여행에세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설이란 장르가 갖고있는 이야기체 구성이 여행이란 행동에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낯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의 출장, 그곳에서 받게 되는 불륜 관계의 애인이 죽었다는 그의 아내로부터의 장난 전화를 통해 애인의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복잡하고도 담담하게 표현해 낸 <전화>.
점쟁이 외할머니가 죽게 된다고 예언해준 1998년 4월 27일, 그날을 아르헨티나에서 맞게 되는 주인공의 하루를 통해 삶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마지막 날>.
하지만 무엇보다도 불륜 관계의 남자와 함께한 여행을 통해 갈색 탁류의 이과수 폭포의 장관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표현해 낸 <창 밖>이 바나나가 이 소설을 쓴 의도가 십분 발휘하고 있는 만큼이나 특별하게 와 닿는다.
투박하기에 오히려 남미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고 생각되는 하라 마스미씨의 그림과 아르헨티나의 절경을 멋지게 담아낸 야마구치 마사히로의 사진 또한 이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 절대 놓쳐서는 안될 특별한 선물.
지구상으로 우리나라의 정 반대에 있는 나라는 다름 아닌 아르헨티나다. 그만큼 지리적, 문화적으로 낯설 수밖에 없는 아르헨티나가 이 소설 속의 인연 이후 다시금 접할 수 있을지는 아쉽지만 미지수. 그렇기 때문일까? 첫 번째 단편 <전화>의 마지막 문장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멋진 추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 두 번은 있을 수 없는 묘한 추억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바나나가 소개한 아르헨티나의 특별하고 색다른 경험은 조만간 타히티 섬을 다녀와서 쓴 '타히티 이야기'로 옮겨와 보다 새롭게 펼쳐질 예정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특별하지만 짧은 여행이 못내 아쉽다면, 혹은 타히티 섬으로의 새로운 경험을 마냥 기다리기가 어렵다면, 그리스의 외딴 섬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낭만적인 유럽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와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름다운 배경을 통해 전개되는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를 다시금 접해 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민음사 / 1만원)
[역사] 동아시아 역사와 일본 – 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