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유학을 전한 조선 선비 강항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46] 전남 영광 '내산서원'

등록 2005.09.12 12:38수정 2005.09.1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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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남 영광군 불갑면 방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내산서원.

전남 영광군 불갑면 방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내산서원. ⓒ 이철영

수은(睡隱) 강항(姜沆)은 영광 사람이다.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30세에 공조좌랑, 형조좌랑에까지 올랐고 30세에 고향에 휴가를 얻어 내려 왔다가 정유재란을 만났다. 1597년 5월 그는 남원성 사수의 책임을 맡은 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이 되어 군량미를 모았으나 이미 성이 함락되어 허사가 되어버리고, 이어 의병을 모았으나 이마저도 병사들이 도망해버려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논잠포(지금의 영광군 염산면 상계리)에서 피난길에 오른다.

a 내산서원에 있는 강항의 초상화.

내산서원에 있는 강항의 초상화. ⓒ 이철영

배 두 척에 나눠 탄 그의 가족들은 여러 날을 영광 앞바다에서 헤매다 결국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기로 작정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짙은 안개 속의 왜군들이었다. 그와 일가족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심은 얕았고 그들은 왜놈들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끌어 올려진다. 그 와중에 강항은 어린 자식들을 둘이나 잃고 만다.


"어린 놈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의 죽음은 너무도 애달프다. 모래사장에 밀려 물결 따라 까막까막 하다가 그대로 바다 깊숙이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엄마야! 엄마야! 부르던 소리 아직도 귓결에 들려온다. 그 소리마저 시들어질 때 산 아비가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 –간양록(看羊錄) 중에서

게다가 중형의 아들 '가련'이마저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닷물을 들이켰다가 토하고 설사를 하자 왜놈들이 바다에 던져 버렸다. 여덟 살의 가련이는 아버지, 엄마를 부르며 물 속으로 사라져 갔다. 대항할 수 없는 폭력 앞에 선 존재의 한없는 무력함이란 얼마만한 깊이로 떨어지는 것일까? 창자가 끊어지고 간이 녹아 버릴 지독한 고통 속에서, 그는 살아남은 아비의 목숨을 던져 버리기 위해, 왜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 본토에까지 끌려가고 만다.

a 조선 중기의 학자 강항을 배향한 내산서원.

조선 중기의 학자 강항을 배향한 내산서원. ⓒ 이철영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전투부대 외에도 도서부, 공예부, 포로부, 금속부, 보물부, 축부로 구성된 6개의 특수부대를 조선에 보냈다. 왜군들은 책, 도자기, 각종 활자본, 가축을 탈취하고 도공, 공예기술자, 지식인을 납치했다. 물론 조선에 비해 뒤떨어진 문물을 일본에 이식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그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남녀 2명의 종이 딸리고 책도 볼 수 있었으며, 한정적이지만 이곳 저곳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사회의 지식층인 승려들과 친교를 맺는다. 그는 또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가 처형장까지 끌려갔지만 쇼군이 존경하는 '카이케이'라는 승려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승려의 도움을 얻어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당시 일본의 장군들은 대다수가 글을 읽지 못했으며 승려들이 유일한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 귀족의 젊은이들이 그러했듯 후지와라 세이카도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했으나 학문에의 열정이 높던 그는 지식인 포로 강항을 찾는다. 그는 강항이 인도하는 조선유학의 새로운 빛에 압도 되어 승복을 벗어 던지고 유복(儒服)을 입는다.


a 내산서원에서 내다 본 앞뜰.

내산서원에서 내다 본 앞뜰. ⓒ 이철영

애초의 시작은 조선에 돌아갈 배를 사기 위한 금전 마련에 있었으나 강항은 그의 학문적 열정에 감탄하여 암기하고 있던 사서오경을 필사해 주는 등 후지와라 세이카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 이를 통해 후지와라 세이카는 에도시대의 통치이념으로 유학을 도입한 일본주자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학계에서는 일본유학의 계통을 이황–강항–후지와라 세이카–야마자키 안 사이로 본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 여우길(呂祐吉)은 포로생활 4년 강항의 행적에 대해 "일본에 갔을 때 왜인들이 그의 절의를 몹시 칭찬했는데…… 있는 동안 모습이나 의관을 바꾸지 않은 채 지냈다"(<현종개수실록>)고 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나라를 재침략하려 할 때 여러 장군들에게 이르기를 "사람마다 귀는 둘, 코는 하나다"라고 하면서 졸병마다 목 대신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코를 베어 올리게 하였다. 그 코를 대불사(大佛寺) 앞뜰에 묻었는데 그로 인해서 큰 산 하나가 새로 생겼다. -간양록

"조선인을 죽이고 귀와 코를 자르니 길바닥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고…… 귀와 코가 잘린 어린애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우는 소리가 온 산천을 진동했다."-종군승려 게이넨의 일기


a 강항 일가족이 피난을 떠났던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상계리)에 후손들이 '섭난사적비(涉亂事迹碑)'를 세웠다.

강항 일가족이 피난을 떠났던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상계리)에 후손들이 '섭난사적비(涉亂事迹碑)'를 세웠다. ⓒ 이철영

그는 일본에서 돌아온 뒤 임금 앞에 나아가 일본생활의 실상과 행적을 아뢰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부끄러운 죄인으로 스스로 칭하고 벼슬을 내려도 나아가지 않았다. 지인과의 편지에서 그는 "(중략)더구나 나는 비록 이 세상에 있다 해도 맥이 풀려 저승의 사람과 같으니, 윤회가 있다면 속히 죽어 다른 삶을 얻기를 바랄 뿐 현세에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고 썼다.

그는 1618년 부친상의 복을 벗은 지 한 해 지나 세상의 일을 마친 듯 세상과의 질긴 끈을 놓았다. 조선인이 일본유학의 비조가 되고, 풍속, 지리, 역사, 군사, 정세는 물론 그들의 후진성과 야만성을 낱낱이 기록한 강항의 간양록은 일제시대 금서의 하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9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oil'사보 9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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