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에 거미줄 친 거미

등록 2005.09.19 16:26수정 2005.09.2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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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물고기 한마리 없는 물속에 낚시대를 드리우듯, 모기 한마리 없는 거실등 밑에 태연히 거물을 드리우고 딱 걸려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거미. 그는 어젯밤 길을 잘못들어 목구멍에 거미줄 한번 제대로 치고 말았다.

물고기 한마리 없는 물속에 낚시대를 드리우듯, 모기 한마리 없는 거실등 밑에 태연히 거물을 드리우고 딱 걸려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거미. 그는 어젯밤 길을 잘못들어 목구멍에 거미줄 한번 제대로 치고 말았다. ⓒ 한석종


어제 저녁(18일) 늦게 나와 아내는 함께 TV 추석특선 명화를 시청하고 있었다. 추석음식을 과식한 탓에 뱃속이 거북했던 나는 잠시 소파에서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다가 무심코 거실등 밑으로 거미 한 마리가 기어르는 모습을 보았다.


거실에 침입한 이 괴한(?)에게 정신이 팔린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보고 있던 영화는 아예 뒷전이 되었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거실등 밑에 자리잡은 거미는 이윽고 가느다란 실을 내 뿜으며 거실등 사이를 바삐 움직이더니 5분도 채 안 되어 거미줄을 다 쳐놓고 숨죽여 웅크린 채 누군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나는 머리도 식힐 겸 가까운 저수지로 낚시 갔다가 꼬박 한나절을 고기 입질 한번 받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수지에 물고기가 없었다면 미끼를 물 턱이 없었을 것이다. 그냥 세월을 낚았을 뿐.

그때 나는 굳이 물고기를 낚고자 했던 건 아니지만 오늘밤 우리집 거실을 찾아와 고기 거물을 치듯 거미줄을 쳐놓고 누군가 걸려들기만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거미로서는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생존방식인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진지하게 우리집에 거미의 희망이 될 법한 모기와 나방 등을 물색하러 나섰다. 우리 아파트는 산과 인접하여 평소 모기들이 심심찮게 출몰하던 터라 우리에게 거미는 그들을 자연스럽게 퇴치시켜 줄 반가운 손님이었다.


하지만 오늘 따라 집에 모기 한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말하자면 거미는 고기 한마리 없는 물 속에 태연히 낚시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베란다까지 나가 구석구석 찾아 보았으나 개미새끼 한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현관문을 나섰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엘리베이터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그 많던 모기와 불나방은 추석명절을 맞아 귀향을 했는지 한마리도 눈에 띄지 않아 이도 허사가 되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난 아직도 거실등 밑에 미동도 하지 않고 딱 걸려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거미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다. 거미줄에는 먼지 한톨도 끼지 않은채 너무나 선명하고 깨끗한 상태 그대로였다.

선명하고 깨끗함이 이렇게도 절망감을 안겨주리라고는 예전엔 미처 몰랐다. 거미에게 이것이야말로 목구멍에 거미줄 치는 격이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여태까지 내가 본 거미줄은 먼지가 희뿌옇게 내려앉아 있고 곤충의 찌꺼기가 말라 붙은 지저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오늘밤 우리집 거실에 쳐놓은 거미줄은 너무나 선명하고 말끔했다. 깨끗하다는 것은 거미에게는 곧 죽음인 것을...

추석명절의 갖가지 음식으로 과식한 탓에 때때로 스트레칭을 해야만 하는 나와 모기 한마리 없는 곳에서 거미줄을 쳐놓고 걸려들기만을 숨죽여 기다리는 거미는 이렇게 한지붕 아래에서 극명하게 삶이 갈렸다.

어느덧 TV의 명화극장이 다 끝나고 하루 방송 종료를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까지 거미줄과 거미는 처음 그 상태,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미는 오늘밤 우리집 거실로 길을 잘못 들어 그야말로 목구멍에 거미줄을 제대로 친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나는 거실로 나가 거실등 밑을 올려다 보았다. 아직도 거미는 한치 흐트러짐도 없이 초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물고기 한마리 없는 저수지에 낚시대를 들여놓고 노심초사 입질하기만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더 이상 거미 목구멍에 계속 거미줄을 치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동업자 정신이 발동이 되어 거미를 집 밖으로 내쫓기로 마음 먹었다.

빗자루를 들고 거미에게 성큼 다가서며 한마디 부드럽게 건넨다. 거미야! 부디 출가를 결심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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