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래 밭에 고구마가 있다니까"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에 넉넉한 마음을 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등록 2005.09.19 18:50수정 2005.09.2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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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가까이 지내는 옆집 어른과 함께 먼 곳으로 고구마를 캐러 갔다. 그분에게 따로 주말농장이나 밭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가끔 어머니를 모시고 먼 곳까지 나들이를 가는데, 그 나들이 길목에 알게 된 주인 없는 밭이 있다고 해서 따라 나선 것이었다.


차를 타고, 솟대 마을로 널리 알려진 충북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를 지나쳤다. 예전에도 그곳을 한 번 지나가긴 했는데, 그때는 너무 바삐 달려서 그런지 솟대와 장승이 멋져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번에는 나들이 길목이라 그런지 어찌나 그 모습들이 멋지던지, 내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뭐든지 바쁜 걸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보다 여유를 가지고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승과 솟대가 나란히 서 있는, 가흥리 마을이에요. 이곳을 지날때만 해도 환하게 웃는 장승처럼 날이 환했지요.
장승과 솟대가 나란히 서 있는, 가흥리 마을이에요. 이곳을 지날때만 해도 환하게 웃는 장승처럼 날이 환했지요.권성권

그곳을 지나쳐, 그 주인이 없다는 밭에 도착했다. 물론 그곳은 흙으로 된 밭은 아니었다. 양옆으로 큰 도로가 나 있고, 그 아래에 기다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또 그 안쪽으로 조그마한 늪지 속 모래밭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래로 된 밭이라 그런지 강물이 범람하거나 홍수가 나면 무슨 곡물이든지 물길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곡식을 먼저 뿌리고 거두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주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야, 내가 말하던 곳이."
"이게 무슨 밭이에요. 순전히 모래 천지구만요."

"그래도 고구마가 있다니까, 캐고 남은 것들 말이야."
"어머니 함께 주우실래요?"

"여기서 얼마나 주울 수 있다고 그러세요."
"한 번 들어가 보자고. 그래도 꽤 주울 수 있을 거야."


그 분은 삽을 들고 앞장을 섰고 그 분의 어머니는 맨 손으로 허리를 숙인 채 뒤를 따랐다. 나는 그 뒤로 검은 봉지 두 개를 들고 따라나섰다. 나는 그 분들을 뒤따라가면서도 결코 고구마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로 된 땅에 고구마가 자라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모래로 된 땅에 고구마를 심고 가꾸었다면, 그 주인이 어찌 그 아낌없는 수고를 그 땅에 놓아 둘 수가 있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콩알만 한 고구마라도 다 거두어가지 않았겠냐는 게 내 생각이었다.

주인 없는 모래밭에서, 열심히 고구마를 줍다보니 벌써 날이 어둑해졌어요. 작은 봉지 두 개에 가득 채웠어요.
주인 없는 모래밭에서, 열심히 고구마를 줍다보니 벌써 날이 어둑해졌어요. 작은 봉지 두 개에 가득 채웠어요.권성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드문드문 가는 길목마다 고구마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분이 고구마 뿌리를 잡아채면 작지만 빨간 고구마 줄기가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 좋은 기분을 놓칠 새라, 그 분의 어머니는 그것을 받아들고서 뿌리와 잔 순들을 꺾으면서 내게 던져주었다.


"우와, 정말로 있네요."
"그렇다니까요."

"할머니, 힘드신 데, 제게 주세요. 제가 해서 담을게요."
"아직 괜찮아요. 이 정도 힘은 있어요."

"재밌지요, 어머니?"
"그러게, 정말 좋은데."
"이 밭 주인, 정말 인심 좋지요, 어머니."

정말로 그랬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습기에 강한 고구마라 할지라도 메말라 버릴 테고, 홍수가 나거나 강물이 범람한다면 분명 물에 씻겨 내려갈 것인데도, 이 모래 땅에 고구마를 심었다니, 이 모래밭 주인은 대단한 사람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아낌없는 수고로 고구마를 길러냈다면 하나도 빠짐없이 담아가도 모자랄 판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남겨 두고 갔다니, 정말로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열심히 돌아다닌 보람이라도 있었던 듯, 해가 다 떨어질 무렵이 돼서는 검은 봉지 두 개에 고구마가 가득 찼다. 그것이면 배불리 먹지는 못해도, 저녁 식사 후 후식으로 충분할 듯싶었다. 더군다나 큼지막한 고구마가 아니라 세 입 정도로 입에 넣으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에, 딸아이에게도 참 좋을 듯싶었다.

주인 없는 고구마 밭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벌써 붉은 노을이 서산을 넘어가고 있어요. 이 또한 그곳 주인처럼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주인 없는 고구마 밭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벌써 붉은 노을이 서산을 넘어가고 있어요. 이 또한 그곳 주인처럼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었어요.권성권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그래서 나는 그 주인 없는 모래밭, 그 고구마 주인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에, 나와 같이 그 길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구마를 주워 갈 수 있도록 넉넉한 마음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정말로 고맙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 분을 생각하자니, 문뜩 구약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그 분처럼, 어렵게 사는 사람들과 내 곁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위해 무엇을 남겨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레위기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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