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천하' 공자가 남긴 가장 값진 일

진현종의 <여기, 공자가 간다>를 읽고서

등록 2005.10.04 18:11수정 2005.10.0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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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쓴 것으로 거의 확실하게 알려진 게 '춘추'이다. '논어'는 공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쓴 것이다. 또 '시경'과 '서경', '역경'은 공자가 많은 이야기들을 끌어다가 편집한 것이다. 그 책들은 순전히 공자를 중심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자가 어떤 이상을 펼쳐 보이려고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역작이 그러하듯 공자가 쓴 뛰어난 작품들도 그 시대의 환경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공자가 '춘추'를 쓴 것은 천하를 돌고 돌다가, 인생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쓴 책이다. 당시에 일어났던 부정과 부패를 바라보면서, 그 역사를 바로 잡고 후대에 바른 역사를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리고 '논어'는 공자를 따라 돌아다니며 배웠던 제자들이 훗날 자기들 나름대로 역량을 발휘해서 쓴 것이다. '시경'과 '서경', '역경'도 공자가 천하를 돌며 각 지방과 각 나라에 퍼져 있는 이야기들을 끌어 모아 좀더 체계적으로 남긴 것이다.

<여기, 공자가 간다> 겉그림
<여기, 공자가 간다> 겉그림갑인공방
그렇다면 공자는 어떤 천하를 돌아다녔을까? 또 어떤 제자들을 데리고 그 천하를 떠돌아 다녔을까? 그리고 그렇게 천하를 돌아다녔던 기간은 얼마나 됐을까? 그 천하를 떠돌아다니면서 가히 제후나 막후에 버금가는 대접만 받았을까? 그 일행들에게 닥쳐왔던 고초나 위기는 없었을까?

그런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준 책이 나왔다. 이름 하여 진현종님이 쓴 <여기, 공자가 간다>(갑인공방·2005)가 그것이다.

"내가 만 리가 넘는 빼션 로드를 순례하고 이 책을 쓰는 것은 다만 공자의 주유천하를 기리는 데 그치거나 적극적으로 신화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공자님이 보여주신 빼션을 통해 나의 빼션을 재점검하고, 이미 겪고 있거나 앞으로 닥쳐올 수난을 용감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서막)

이 책은 공자 일행이 14년에 걸친 '주유천하'를 하나하나 추적하여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행문 같은 성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지은이는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녔을 그 발자취를 밟기 위해 홀몸으로 현지를 추적해 갔다. 이는 공자 일행이 그 당시 내딛은 열정에 비하면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오늘날 광활한 중국 영토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열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공자가 고향 땅 노나라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주유천하를 시작한 때는 그의 나이 55세였다. 손자의 재롱을 보고,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도 될 법한 그 나이에 왜 그는 천하를 돌아다닐 생각을 했을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 차원이었을까? 아니면 제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을까?

공자가 제자들 일행을 데리고 떠난 것은 오직 자기를 알아주는 제후를 만나 이상정치를 펼쳐보고자 함이었다. 이를테면 노나라에서는 이미 관료들 사이에 뇌물이 판을 치고 있었고, 백성들까지도 자기 나라에는 이미 도가 없다며 자기 입맛에 맞는 도를 모두를 논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된 도를 펼쳐보고자 다른 나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 공자와 함께 따라다녔던 그 제자들은 누구 누구였을까? 우선 공자가 그 누구보다도 아꼈던 노나라 출신 '안연'이 있었다. 그는 공자보다 서른 살 아래였는데, 실로 공자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넘버 투'였다. 그리고 공자보다 아홉 살 연하인 노나라 출신 '자로'가 있는데, 그는 공자를 업신여기고 폭행까지 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공자와 연을 맺은 후에 공자를 모든 배후에서 지켰던 경호원 노릇을 했다.

또 '자공'이란 제자도 있었는데, 그는 위나라 출신으로서 공자보다 서른한 살이나 아래였다. 그는 언변이 뛰어났는데, 그 때문에 종종 공자에게 쫑코를 먹곤 했다. 그러나 그 자공 덕에 공자는 훗날 자기의 이름을 천하게 날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노나라 출신이요 공자보다 스물아홉 살 연하인 '염구'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약삭빠른 길을 택해 공자 학당에서 파문당하고 만다.

아무튼 그런 그들이 한 무리를 지어 노나라 곡부에서 위나라로, 위나라에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정나라로, 정나라에서 진나라로, 진나라에서 초나라로, 초나라에서 위나라로, 그리고 다시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고 돌아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니, 실로 엄청난 여행길이었다.

그 여정 속에는 결코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수난에 수난을 거듭한 길만 맞이하게 됐다. 위나라에서 곧바로 진나라로 가려던 길목에, 그곳 사람들로부터 공자가 '양호'라는 인물과 닮았다하여 돌팔매질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이른바 '광야의 수난'을 당할 뻔한 것이다. 그리고 송나라에서는 공자가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어, 공자가 머물고 있는 집에 '폭탄테러'를 감행하려고도 했다. 이른바 그 집 뒤에 있는 큰 소나무를 쓰러뜨려 공자를 덮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공자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제자들은 '공자 일병 구하기' 작전에 들어가게 된다. 공자를 닮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자공은 정나라 도성의 동문에 가서, 그곳에 노숙하던 공자를 찾아서는 다른 제자들과 만나기로 한 곳에 돌아왔다. 안연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감격스런 눈물을 흘리며 반기자 공자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랑스럽게 '사문재자'의 변조 아리아를 부른다." (162쪽)

결국 공자의 나이 68세 되던 해, 칠십을 바라보는 그 나이에 그는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된다. 그것도 자기 제자 염구가 연줄을 닿지 않았다면 큰소리 한번 제대로 내보지 못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금의환향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큰 뜻을 이루며 이상정치와 참된 도를 실현해보고자 떠났던 공자의 주유천하는 실패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유천하는 결코 실패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제자들을 이끌고 떠난 14년간의 주유천하 덕에 결국 '춘추'가 탄생됐고, 그의 제자들이 쓴 '논어'도 태어났으며, 그리고 그가 엮은 '시경'과 '서경'들도 그 덕에 태어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자와 함께 천하를 떠돌아다녔던 제자들도 스승님을 향해 실로 잊지 못할 참된 명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춘주>를 저술하는 공자의 태도에는 사뭇 다른 데가 있었다. 일찍이 제자들은 공자를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전연 없으셨다. 사사로운 의견이 없고, 무리한 강요가 없고, 고집이 없었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305쪽)

그런 면에서 이상정치나 놀랄만한 업적을 이루진 못했어도, 실로 제자다운 제자, 사람다운 사람들을 그 주변에 남겼다는 것이 공자가 주유천하를 하면서 남긴 가장 값진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여기, 공자가 간다 - 해동 선비가 찾아나선 열정과 수난의 주유천하 14년

진현종 지음,
갑인공방(갑인미디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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