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흐드러진 민둥산에서 구름에 취하다

<바위나리와 떠난 여행 - 14>구름처럼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등록 2005.10.07 09:58수정 2005.10.0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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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간고사를 보는 학교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중간고사 보느라 몸도 마음도 파김치가 되어 살고 있지만 교사들에게는 조금의 여유가 있는 기간입니다.

정규수업은 물론 보충수업에 밤을 하얗게 밝히며 야간 자율학습 감독까지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들은 여유란 말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방학이라도 있으니 그게 어디냐고 하지만 방학은 형식일 뿐이고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은 여전합니다.


시험 기간에는 아이들이 오전에 시험을 마치고 귀가하기 때문에 정시 퇴근이 가능합니다. 모처럼의 여유를 찾은 교무실 선생님들과 민둥산을 찾았습니다. 억새가 장관인 민둥산에서 그간에 찌든 삶의 때를 훌훌 털고 오자고 했습니다.

38번 국도를 타고 증산까지 가다보면 차창 밖으로 손 내밀면 닿을 것처럼 좌우로 산이 솟아 있습니다. 산 첩첩 내 고향을 그리던 신사임당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국도를 따라 강원도 내륙 깊숙이 달려보면 강원도가 산골이란 느낌이 절로 듭니다.

민둥산 정상을 향해 오르며 바라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곧 이어 찾아들 어둠을 맞을 준비를 하는지 한곳에 차분하게 머물러 있는 모습이 아니라 어디론가 분주하게 떠나는 모습입니다.

이기원

이기원
한참을 오르다보니 억새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는 보는 이의 눈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이 됩니다.

이기원
애절한 슬픔을 간직한 이들에겐 슬피 우는 모습인 것 같고, 소 먹일 풀을 베다 억새 잎에 손을 벤 경험이 있는 이들에겐 선홍빛 아픈 추억이 되어 다가서기도 합니다.


이기원
다정한 연인이 되어 억새밭에서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었던 이들에겐 더 없는 그리움의 모습이 되겠지요.

이기원
억새 너머로 하얀 구름이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새하얀 억새처럼 바람 따라 흔들리긴 마찬가지입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와 구름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보기 좋은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억새와 구름이 연출한 풍경을 보며 흔들리는 것들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흔들리는 게 억새와 구름만은 아닙니다. 흔들리며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의 애잔한 삶을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추수 끝난 강둑에 무리지어
다 끝나가는 한 생을 마저 살려고
마구 흔들어대는 저 으악새는
어떻게 내 마음을 통째로 뒤흔들지 않고
내 곁을 지나친단 말인가

성주 가천 닷새장 파장에 부는 소슬바람도
대가천 식당 할매가 말아내는 돼지국밥도
정류장 둘레에 퍼질러 앉아
금방 밭에서 뽑아온 무 배추 몇단 놓고
국수 말아먹는 아낙의 등 굽은 가계도

어찌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 지나치리
그 모습에서 감동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 웃음에서 가버린 세월을 되감아오기도 하고
하다못해 연민의 눈길이라도 욕심껏 퍼붓고 갈 일이니

세상에 저 홀로 흔들리는 것 무엇 있으리 - 배창환,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전문


찌든 때 훌훌 털고 가려면 억새 숲에 몸 담그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가 되어 함께 흔들리며 오래도록 머물러야 하겠지만 지는 해가 우리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무언가 중요한 걸 두고 오는 이들처럼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세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기원
38번 국도를 타고 오는 길에 저녁놀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차를 멈추고 붉은 저녁놀을 카메라에 담는 선생님을 지켜보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어느새 민둥산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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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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