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기름 못 준다' 표변한 미국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6자 회담에 암운?

등록 2005.10.07 11:20수정 2005.10.0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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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극우신문인 <산케이신문>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한국을 비판했다는 게 <산케이신문>의 보도내용. 지난달 29일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초청 비공개 연설에서 힐 차관보가 "6자회담에서 한국은 미국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비판했고, 4차 6자회담 타결 직후 한국이 대규모 대북지원 방안을 언급한 데 대해 "한국의 그런 발표가 6자회담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산케이신문>의 보도 직후 한미 관계자들은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발언 당사자인 힐 차관보는 발언 진위를 묻는 한국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얘기한 것"이란 말로 즉답을 피해갔고, 주미 한국대사관도 힐 차관보의 발언 내용을 모두 파악하고 있지만 미 정부 측이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임을 들어 공개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고 한다. <연합뉴스> 워싱턴 특파원이 오늘 새벽 전한 내용이다.

궁금하다. 힐 차관보가 정말 그렇게 얘기했는지가 <연합뉴스> 보도에선 정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가 "매우 불쾌한 보도"라고 말한 걸 보면 <산케이신문> 보도가 허위이거나 과장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힐 차관보도 한국 기자들 앞에선 "한국은 미국 입장을 적극 지지해줬다"고 말했고,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 역시 "한국 대표단이 베이징에서 한 역할에 매우 감사하고 있다"고 평한 것도 <산케이신문> 보도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미 의회 북핵 청문회서 쏟아진 강경한 발언들...

하지만 이건 모두 추정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속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니고, '표리부동'이란 말이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란 점을 감안하면 확인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이 문제는 다른 언론의 '추적'을 기대하면서 일단 접자. 그보다 더 중한 뉴스가 있다. 6자회담 공동성명에 대한 미국 조야의 분위기를 전하는 뉴스다.


<연합뉴스>가 오늘 새벽 타전한 미 의회의 북핵 청문회 소식은 우려할 만하다. 현지시각으로 6일 미 의회에서 열린 북핵 청문회에서 쏟아진 미국 정치인들의 발언은 공동성명이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헨리 하이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은 청문회 개막사에서, 공동성명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인 고농축 우라늄 문제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은 반면, 그간의 대북 협상 기조였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방법으로 북핵을 폐기해야 한다는 원칙이 슬그머니 종적을 감췄다고 맹비난했다.


하이드 위원장은 "한국이 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으면 주적이 누구인지를 밝히라"라고 요구했던 인물이다. 그만큼 미국 조야에선 강경 매파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러려니'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4일 짐 리치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동아태 소위원장의 말을 인용해 "5차(6자) 회담은 4차 회담보다 상당히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 폐기 약속 이행에 대한 압박을 한층 강화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를 제기하는 것이라는 보도다.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과 소위원장의 말을 종합하면, 미국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고리로 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려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전가의 보도'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재등장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때마다 써온 전가의 보도다. 북한은 한사코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은 결단코 있다고 맞받아쳤고 그때마다 북미 양국의 긴장도는 올라갔다.

이런 일진일퇴의 대립상황 속에서 어렵사리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는데 또 다시 미국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고리로 걸고 나섰다. 공동성명에 대한 북한의 진정한 이행의사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를 공개리에 실토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이런 계획을 들고 나왔다고 해서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이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공동성명엔 북한이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라고 분명히 명시돼 있다. 미국은 공동성명의 기초 위에서 전술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집중 제기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이 5차 6자회담의 전도를 어둡게 한다고 '우려' 할지언정 완전히 판을 깨는 행동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공개리에 '비난'을 해도 무방하다.

북핵 청문회에서 하이드 위원장은 "북한에 중유를 추가로 제공할 경우 엄청난 반발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트리나와 리타가 강타하면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단전의 불편은 물론이고 유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마당에 북한에 추가로 중유를 제공하겠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강경 매파의 '망발' 정도로 치부하고 싶지만 사정이 그렇지가 않다. 북한을 두 차례나 방문한 미 민주당의 톰 랜토스 의원도 "수십 억 달러의 피해를 안겨다준 허리케인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당분간 국내 문제에 집중시키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 중유 지원문제는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매파와 비둘기파 구분 없이 공히 쏟아져 나오는 '기름 못줘'란 말들은 분명 5차 6자회담의 전도를 가로막는 암초다. 암초일 뿐만 아니라 공동성명 문구를 '박박' 지우는 지우개이다.

공동성명에는 이렇게 명시돼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대한민국, 러시아연방 및 미합중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에너지 지원을 제공할 용의를 표명하였다."

공동성명 잉크 마르기도 전에 '기름 못줘' 외치는 미국

이 공동성명에 서명 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미국은 '기름 못줘'를 외치고 있다. 혹자는 "당분간"이란 표현을 근거로 허리케인 피해 수습 때까지의 유보적 조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공동성명에 에너지 지원 문구가 삽입된 것을 두고 다수의 전문가들은 중유→전력→경수로 지원의 3단계 방안이 강구된 것으로 해석했다. 남한이 전력을 공급하기 전까지 중유를 지원해 북한의 에너지난을 덜어주고, 궁극적으로는 경수로를 지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에너지 지원 방안을 두고 논란이 빚어진 것은 경수로 지원 논의 시점뿐이었다. 북한이 선(先)지원을 주장한 데 반해 미국은 북핵이 완전 폐기된 이후 경수로 지원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북미 양국의 틈바구니에서 남한 정부는 북한이 핵확산 금지조약에 재가입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이 개시되는 시점에 경수로 지원 논의를 본격화 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밀고 당기는 기세싸움 속에서도 중유 제공문제는 논란거리로 등장하지 않았다. 중유 지원은 남한의 전력 공급 이전에 취해야 할 선행조치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치인들이 느닷없이 "에너지 지원을 제공할 용의"마저 거둬들이고 있다. 허리케인 피해복구에 1년 넘는 기간이 소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상황에서, 5차 6자회담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우리부터 살고 봐야 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나섰다.

미국의 이런 태도를 북한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불문가지다. "기름 못줘"라는 미국에 맞 북한이 "그럼 핵 포기 안 해"로 나오면 난처해지는 건 남한 정부다. "배째라"에는 백약이 무효한 법,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을 설득해 '십시일반'에 나서는 게 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국내 보수언론이 달려들 것이다. "왜 우리만 덤터기 쓰느냐"면서….

상황은 이래저래 꼬여가고 있다. 4차 6자회담에서 보여준 남한 정부의 중재노력이 다시 한번 발휘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북미 양국을 어르고, 때로는 다그치면서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 설령 미국이 "한국이 미국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미국에겐 몇 푼 아끼는 문제이지만 우리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허리케인 피해 복구 지원비로 3000만 달러의 거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힌 남한 정부로선 미국의 얌체짓을 힐난할 자격을 충분히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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