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통이 오면 평양에서 출산하죠, 뭐..."

수배 7년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 윤기진씨 가족 평양행... 만삭의 아내 황선씨도 동행

등록 2005.10.10 15:23수정 2005.10.10 22:19
0
원고료로 응원
a 아리랑 관람차 평양을 방문하는 국가보안법 수배 7년차 윤기진씨의 가족(왼쪽부터 부인 황선씨, 부친 윤범노씨, 모친 김종숙씨) 특히 황선씨는 다음주 분만예정인 만삭의 몸으로 평양으로 떠났다

아리랑 관람차 평양을 방문하는 국가보안법 수배 7년차 윤기진씨의 가족(왼쪽부터 부인 황선씨, 부친 윤범노씨, 모친 김종숙씨) 특히 황선씨는 다음주 분만예정인 만삭의 몸으로 평양으로 떠났다 ⓒ 박준영

“평양요? 그 정도 거리면 걱정 말고 다녀와도 됩니다.”

오는 17일이 분만예정일인 황선(통일연대 대변인)씨의 주치의가 평양행 비행기를 타도 되겠냐는 황선씨의 조심스런 질문에 던진 너무나도 뜻밖의 답이었다. “어디요? 평양이요?”라고 반문할 줄 알았던 황선씨에게 주치의의 흔쾌한 답은 남녘과 북녘의 허물어진 담벽을 절감하는 또 한 번의 사건이었단다. 이렇게 주치의의 허락으로 황선씨는 시부모님과 함께 10일 오전 9시 5분에 출발하는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곧 세상에 울음을 터뜨릴 아이와 함께….

잘 알겠지만 황선씨는 98년 한총련 대표로 5개국을 돌고 돌아 평양을 방문했다가 남쪽으로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징역살이를 한 바 있다. 뿐만 아니다. 이번에 그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는 시부모님들은 7년째 국가보안법 수배자로 얼굴 한 번 제대로 볼 수 없는 아들(윤기진,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을 두었다. 그래서인지 황선씨 가족의 평양 방문은 예사롭지가 않다.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심란해. 통일이 얼렁 돼서 아들이나 봤으면 좋겠어.”

슬픈 웃음을 지어보이는 어머니 김종숙씨의 마음은 황선씨 가족 모두의 마음일 듯. 사실 황선씨 가족의 평양행은 성사되지 못할 뻔했다. 지난 6일로 참관 날짜가 잡혀 온 밤을 꼬박 새고 새벽 4시 30분에 출발해 공항에 도착했으나, 명단 누락으로 공항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부모님이 실망감에 평양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거다.

두 분의 평양행이 만만치 않은 비용(당시 황선씨는 분만 날짜가 잡히지 않아 평양방문을 계획하지 않았다)도 걱정이었는데 큰 맘 먹고 나선 길이 좌절되니 갈 마음을 접으신 거였다. 완강한 아버님때문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단다. 급기야 윤기진씨가 나섰고 아들과의 통화를 끝낸 아버지는 전과는 180도 다른 모습으로 ‘가겠다’고 입장 선회. 도대체 아들과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꼭 다녀오라고 그러더라고. 기진이랑 이야기를 하다보니 기진이가 하는 일의 다문 100분지 1이라도 성의를 보이고 싶었어. 그래서 가기로 결정했지.”

아들의 간곡한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윤기진씨의 부모님은 아들의 몫까지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낄 생각 때문에 전날 밤도 꼬박 밤을 샜다고 한다. 이렇듯 황선씨 가족들의 평양행은 감격과 착잡함이 함께 한다.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탔다는 말을 실감하는 아리랑 관람을 하게 됐지만 국가보안법 7년차 수배자를 아들, 남편으로 둔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무법자’였던 것이다.


시인이기도 한 황선씨는 “요즘은 시를 쓸 필요가 없어요. 남북경제회담, 장관급 회담에서 발표되는 공동보도문들이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시거든요. 그보다 더 감격스럽고 열정적인 시를 어떻게 쓸 수 있겠어요”라며 말하면서 웃는다.

한편으로 아내이자 통일운동가인 황선씨는 “하루 수백 명이 평양을 오고가는 현실을 보면서도 가슴 한 쪽이 ‘싸아’ 하게 아려오는 걸 느껴요. 언제 어떻게 국가보안법이 죽음의 칼날을 휘두를지 모르잖아요. 그 증거가 우리 얘기 아빠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다.


국가보안법에 발목이 묶여 있는 남편을 생각해서 더더욱 평양행을 결심하게 된 황선씨. 처음에는 뱃속의 아이 때문에 걱정 반 두려움 반이었단다. 그렇지만 남편 몫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산통이 오면 평양에서 출산하자’는 뱃심으로 결심하게 됐단다.

어쨌든 오늘 평양행 아시아나 비행기는 뱃속의 아이까지 해서 황선씨 네 가족을 비롯해 290여명을 싣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지금쯤 평양 시내를 달리고 있을 황선씨 가족들. 혹시 ‘남측방문객, 평양산원에서 건강한 아이 출산’이라는 기쁜 소식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자주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자주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주권자전국회의에서 파트로 힘을 보태고 있는 세 아이 엄마입니다. 북한산을 옆에, 도봉산을 뒤에 두고 사니 좋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3. 3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4. 4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5. 5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