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깽이도 덤벙이는 가을입니다

등록 2005.10.18 10:59수정 2005.10.1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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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는 추수에 여념없는 농민들의 땀이 흥건히 배어 있습니다. 하루 해는 짧아지고 금방이라도 서리가 내릴 것처럼 새벽 공기가 싸늘합니다. 한창 바쁠 때면 어른들은 "손이 여벌로 서너 개는 더 달렸으면 좋겠다"며 웃으셨습니다. 오죽이나 바쁘면 부지깽이도 덤벙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농촌 들녘은 구릿빛 건장한 농부들의 땀방울이 아닌 나이 지긋한 노인들의 힘겨운 삭신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배어 있습니다.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가을이지만 나이든 분들의 힘겨운 노동을 덜어줄 젊은이들은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받으실 날짜가 다가와 병원비와 함께 간식으로 드실 사과 한 상자를 가지고 고향을 찾았습니다. 집에 도착해보니 어머니도 아버지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온 짐을 내려놓고 밭으로 갔습니다.

이기원
아버지 혼자서 들깨를 베고 계셨습니다. 멀리서 아버지를 부르니 손을 흔들며 웃으십니다. 밭으로 갔더니 들깨 베어낸 대궁 위험하다며 들어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십니다. 대궁 잘못 밟으면 신발 찢어진다고 걱정하시는 겁니다.

"어머닌 어디 가셨어요?"
"밤 팔러 갔다."
"언제 가셨는데요?"
"아홉시 반 차 탔으니 점심때 지나야 올 게야."

새벽마다 동네 산을 돌아다니며 떨어진 알밤을 주워 모아 시장에 내다 파시는 겁니다. 굽은 허리로 밤 한 말씩을 들고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젠 넉넉지는 않지만 용돈 보태 드릴 테니 편히 쉬시라고 해도 건성으로 알았다고 대답만 하십니다.


이기원
아버지를 도와 들깨를 벨까 했더니 이미 일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마를 캐기로 했습니다. 몇 고랑 되지도 않는데 혼자 캐도 충분하니 집에 가 쉬라는 아버지 말씀에 알았다고 하고는 집에 가서 호미 세 자루를 챙겨 다시 밭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내와 아이에게도 호미 한 자루씩을 주었습니다. 괜찮다며 말리시던 아버지는 벌써 낫을 들고 고구마 덩굴을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소풍 때 고구마 캐기 체험활동을 한 적이 있는 아이는 호미를 잡고 고구마에 상처 내면 안 된다며 조심조심 흙을 팠습니다. 고구마는 많이 캐보았다며 달려든 아내와 내 호미에 고구마가 몇 번이나 찍히고 긁혔습니다.


"상채기 난 고구만 금방 썩는다."

끝내 아버지 걱정을 듣고 말았습니다. 잘할수록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걸 가르쳐 주는 가을 들녘의 가르침을 어쩌다 한 번 내려와 일 거들고 가버리는 우리 내외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기원
"아들 메누리까지 고구마 캐러 왔네."

동네 할머니가 호미 들고 지나가다 말씀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 고구마를 사흘째 혼자 캐고 있다고 하십니다. 이젠 힘도 없어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푸념처럼 말씀하십니다.

추수를 기다리는 가을 들녘은 한가하지 못합니다.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가을 들녘은 그러나 활력이 넘쳐나는 모습은 아닙니다. 남은 힘 쥐어짜며 삭신을 움직여 사시는 분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어 가는 모습이 오늘날 농촌 들녘의 풍경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 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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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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