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가을 내음에 취하고 시향(詩香)에 취하고

가을 하늘에 모닥불처럼 피어오르는 시낭송 소리

등록 2005.11.02 08:34수정 2005.11.0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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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갛게 물든 담쟁이와 아직도 초록빛이 감도는 은행나무의 아름다운 조화~
빨갛게 물든 담쟁이와 아직도 초록빛이 감도는 은행나무의 아름다운 조화~김형태

가을은 따사로운 햇볕을 모아놓고 날 공원으로 오라 합니다.
가을은 따사로운 햇볕을 모아놓고 날 공원으로 오라 합니다.임정일

진한 국화향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꿀을 따는 나비와 벌
진한 국화향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꿀을 따는 나비와 벌김형태

꽃에 취한 꿀벌. 나도 한 마리 꿀벌이 되어 가을에 취하고 싶습니다.
꽃에 취한 꿀벌. 나도 한 마리 꿀벌이 되어 가을에 취하고 싶습니다.김형태
저만치 드높고 파아란 가을하늘 아래, 나무들은 제 각각 곱디고운 단풍옷으로 단장해 그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고, 만발한 국화는 그 빛깔과 향기로 벌나비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만추(晩秋)의 오후.

커피 한 잔 뽑아 들고 괜스레 고독을 씹으며, 몇 장 남지 않은 가을을 눈으로 가슴으로 주워 담다가, 공원 한켠에서 가을 저녁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낭송 소리 있어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아주 조촐한 모임이겠거니 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놀랐습니다. 정보통신과 영상물의 거센 물결에 밀려 ‘이제 문학은, 그 중에서도 특히 시는 죽었다’고들 말하는 이 시대에 아직도 시를 만끽하는 해맑은 영혼들이 이렇게 많다니, 갑자기 가을하늘처럼 마음이 맑아졌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또는 눈을 뜨고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시를 감상하고 있는 해맑은 사람들
지긋이 눈을 감고 또는 눈을 뜨고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시를 감상하고 있는 해맑은 사람들김형태

(좌)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낭낭한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는 한 할머니, 마치 한송이 하이얀 국화꽃 같았습니다 / (우)어르신의 시낭송 소리에 어느새 사람들의 가슴도 단풍으로 물들고.
(좌)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낭낭한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는 한 할머니, 마치 한송이 하이얀 국화꽃 같았습니다 / (우)어르신의 시낭송 소리에 어느새 사람들의 가슴도 단풍으로 물들고.김형태
낭송하는 사람이 대부분 여자들이겠거니, 그리고 아마도 젊은 층이 다수이겠거니 여겼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나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50여명의 참가자 중, 물론 여자들이 많았고 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자들도 꽤 되었고 특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눈에 띄어 저도 몰래 국화꽃처럼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고양이 걸음으로 맨 뒤에 앉아 깊어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시낭송을 감상하였습니다. 제가 익히 아는 미당의 ‘국화 옆에서’,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정호승의 ‘너에게’, 안도현의 ‘준다는 것’, 김용택의 ‘11월의 노래’, 이해인의 ‘내 마음의 가을숲으로’ 등 주옥같은 애송시들이 모닥불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이런 애송시에 귀가 한껏 즐거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류성주라는 중년남성이 낭송한 류지남의 시 ‘빨래를 개는 재미’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마감뉴스와 함께 돌아온 밤
개다 만 빨래와 함께 거실 바닥에 구겨진
잠든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숨소리도 조심조심 남은 빨래를 개 본다

나이를 먹듯 조금씩 삶의 흔적이 늘어 가는 것들
하나 하나 개어 식구들 별로 나누다 보면
큰애 건지 작은애 건지 구분이 잘 안 가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날 다시 세워 서늘해진 옷들의 푸릇한 살결과
아직도 왠지 조금은 겸연쩍은 아내의 브래지어며
팬티의 속살 여기저기에 돋은 몽글몽글한 것들이
가볍게 코까지 골고 있는 보푸라기 가득한 얼굴과 어우러져,

고단한 삶의 무게 같기도 하고 어쩌면
첫날밤의 아슴프레한 떨림 같기도 한 것이
무디어져 가는 가슴 슬며시 찔러 대는 것이다



이 시 속의 화자는 어쩌면 난생 처음 빨래를 개보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내가 깰까 조심조심 빨래를 개는 남편의 모습이 연상되면서, 그의 아내 사랑이 국화꽃처럼 진한 향기로 물밀어오고 있었습니다.

우아한 자태가 국화가 아니라 마치 한떨기 연꽃 같습니다.
우아한 자태가 국화가 아니라 마치 한떨기 연꽃 같습니다.김형태
이러한 유명시인의 애송시도 좋았지만, 그러나 정작 시인이라는 명함이 없는 일반인의 창작시 낭송이 저의 심금을 더 울렸습니다.

어떠리

- 박상배 님 창작시 낭송

우리는 늙었거니 / 서서 간들 어떠리 //
곧 누워 / 편히 쉴 우리기에 / 한창 일하는 / 젊은이들 / 앉아간들 어떠리 //
공부할 / 책가방 / 듬뿍 들고 / 어깨 무거운 / 소녀소년들 / 앉아간들 어떠리 //
청춘남녀 / 어젯밤 / 데이트하고 / 힘없이 서 있겠는가 / 앉아서 뽀뽀 하도록 두고서 / 우리는 늙었거니 / 서서간들 어떠리 / 서있을 날도 / 얼마나 남았다고


시조풍의 이 시를 만약에 젊은이가 썼다면 야단맞았겠지만, 연세 드신 분이 손수 써서 낭송하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노인에게 양보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우리 사회에서, 한 번쯤 그것을 뒤집어 놓고 보니 새롭습니다. 발상의 전환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젊은 세대를 생각하는 사려깊음에 감동 받았고 삶의 달관이 엿보여 좋았습니다. 아마도 체험에서 우러나온 작품일 것입니다. 낭송하는 박할아버지의 눈빛이 고운 단풍잎을 닮아 있었습니다. 저도 저렇게 곱게 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갑자기 옷깃이 여미어졌습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단풍잎,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단풍잎,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김형태
아버지

- 이형준 창작시 낭송(서울공고 3학년)

어느 날 서랍 속 먼지 쌓인
낡은 앨범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앨범 속에는, 나의 장난스러움이
묻어나는 사진들과

우리 가족들의 행복한 사진이
날 웃게 만들었습니다.

앨범을 한 장, 두장 넘기고
마지막 장이 되었을 때

빛바랜 사진 속 희미한 글씨가
날 눈물짓게 만들었습니다.

“언제나 잊지 않을게... 사랑하는 당신에게”

사진속 아버지 그리워하며 흘린 어머니의
눈물과 그리움이 날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사진 한 장 본 적 없는 아버지
그토록 불러보고 싶던 그 이름 아버지

사진속으로나마 볼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 시를 들으면서 시인이란 이름이 부끄러웠습니다. 비록 투박한 작품이지만 그 속에는 진주가 박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듣다보니 어느새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아들 하나 믿고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 이 시 속에는 어머니와 아들의 눈물 젖은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언제나 잊지 않을게... 사랑하는 당신에게.”

어쩌면 이 말 한마디가 형준군 어머니를 오늘날까지 꿋꿋하게 살게 하는 버팀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들 모자에게는 아버지, 또는 남편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눈물이 날 것입니다. 마치 물에 젖은 담쟁이처럼.

물에 젖은 담쟁이잎의 일편단심, 이래서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나 봅니다.
물에 젖은 담쟁이잎의 일편단심, 이래서 단풍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나 봅니다.김형태
저는 오늘 하루 행복했습니다. 사막길을 걷다가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또는 무더운 여름철 터벅터벅 길을 가다가 청량한 소낙비와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난 것처럼.

시낭송회가 끝나고 돌아서 나오는데 "시는 돈이나 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인종청소나 유고의 코스보 인종 청소와 같은 무도한 짓을, '차마 할 수 없다'라고 느끼게 하는 항체를 기르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귓전에서 한참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시 3백여편을 줄줄 외운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 대화에는 시가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 나라 사람들이 속담이나 한자성어를 자연스럽게 섞어서 쓰는 것처럼. 문화대국을 꿈꾸는 우리가 한 번쯤 귀기울여야 할 사항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정서가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또한 실용성과 상업성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시를 음미하고 낭송하며 인간존재의 의미를 고민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시를 음미하고 낭송하는 건강함이 가을빛처럼 우리 사회에 더욱 널리 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되기를 두 손 모아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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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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