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낭낭한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는 한 할머니, 마치 한송이 하이얀 국화꽃 같았습니다 / (우)어르신의 시낭송 소리에 어느새 사람들의 가슴도 단풍으로 물들고.김형태
낭송하는 사람이 대부분 여자들이겠거니, 그리고 아마도 젊은 층이 다수이겠거니 여겼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나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50여명의 참가자 중, 물론 여자들이 많았고 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자들도 꽤 되었고 특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눈에 띄어 저도 몰래 국화꽃처럼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고양이 걸음으로 맨 뒤에 앉아 깊어가는 가을을 배경으로 시낭송을 감상하였습니다. 제가 익히 아는 미당의 ‘국화 옆에서’,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정호승의 ‘너에게’, 안도현의 ‘준다는 것’, 김용택의 ‘11월의 노래’, 이해인의 ‘내 마음의 가을숲으로’ 등 주옥같은 애송시들이 모닥불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이런 애송시에 귀가 한껏 즐거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류성주라는 중년남성이 낭송한 류지남의 시 ‘빨래를 개는 재미’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마감뉴스와 함께 돌아온 밤
개다 만 빨래와 함께 거실 바닥에 구겨진
잠든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숨소리도 조심조심 남은 빨래를 개 본다
나이를 먹듯 조금씩 삶의 흔적이 늘어 가는 것들
하나 하나 개어 식구들 별로 나누다 보면
큰애 건지 작은애 건지 구분이 잘 안 가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날 다시 세워 서늘해진 옷들의 푸릇한 살결과
아직도 왠지 조금은 겸연쩍은 아내의 브래지어며
팬티의 속살 여기저기에 돋은 몽글몽글한 것들이
가볍게 코까지 골고 있는 보푸라기 가득한 얼굴과 어우러져,
고단한 삶의 무게 같기도 하고 어쩌면
첫날밤의 아슴프레한 떨림 같기도 한 것이
무디어져 가는 가슴 슬며시 찔러 대는 것이다
이 시 속의 화자는 어쩌면 난생 처음 빨래를 개보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내가 깰까 조심조심 빨래를 개는 남편의 모습이 연상되면서, 그의 아내 사랑이 국화꽃처럼 진한 향기로 물밀어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