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백두에서 남녘으로 흐른 통일단풍 물결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금강산 설악산 찍고 내장산에 이르다

등록 2005.11.03 17:01수정 2005.11.0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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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음까지 졸이게 하는 단풍. 그대 마음도 이리 붉게 타오릅니까?

마음까지 졸이게 하는 단풍. 그대 마음도 이리 붉게 타오릅니까? ⓒ 김규환

시베리아 고기압이 차차 세를 넓히기 시작했다. 동몽골로 싸한 바람을 전했다. 먼지투성이였다. 누런빛이다. 자작나무 하얗고 매끈한 다리도 색이 바래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곳곳에서 야단이다. 좌장이 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떠나기로 결정했지만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나는 그들 마음속엔 어디를 간들 이보다는 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남국 나들이 나선 지 벌써 한달이련가. 전나무 소곤대는 소리도 나지막이 들렸다. 피난민은 아닌 듯 가볍지만 단단히 채비를 하였다. 이웃에게 들킬세라 땅바닥을 기었다. 고향을 찾은 실향민일까. 어둑어둑하여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다소 여유가 있는 걸로 보아 밤밥을 먹고 도망하는 건 아닐 듯싶었다.

정규군은 더더욱 아니다. 하도 멀어 사람인지 뭔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소박하게들 차려입고 짐 보따리는 최대한 가볍게들 졌다. 아이들은 호주머니에 자그마한 희망의 알을 넣은 듯하다. 불꽃을 짊어진 이는 몇이 되지 않았다. 불발탄은 있을 수 없을 거라며 서로 다독이고 위로했다. 오로지 그들은 희망을 쏘기 위해 남쪽만 바라보고 걷고 있었다.

한 점 불빛 없는 심산계곡만을 골라 전전하더라. 절벽 위에선 소스라치게 미끄러졌지만 이내 일어났다. 큰 내를 만나면 정강이를 적시기도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군인이나 민간인이 나타날까봐 풀숲에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곰처럼 한여름에 먹어뒀던 양분을 꺼내어 삼키며 몇날 며칠을 보냈는지 모른다. 헉헉거리며 기어올랐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a 담쟁이도 노랗고 붉습니다. 담장 타고 오른 담쟁이가 있는 고향마을이 그립습니다.

담쟁이도 노랗고 붉습니다. 담장 타고 오른 담쟁이가 있는 고향마을이 그립습니다. ⓒ 김규환

갖가지 주장이 난무했다. 차라리 올 겨울만 넘겨서 감행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회령에서 기차에 몸을 싣자고 했다.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요란하여 은밀하게 아랫녘까지는 순탄하게 데려다 줄 거라는 말도 나온다. 누구는 두 쪽으로 나뉘어 한 패는 서해로 가자고 했으나 노출이 심해 은거하기 힘들어 압록강철교 밑을 거쳐 신의주 앞바다로 가는 건 포기했다.


노 젓는 뱃사공에게 쌈짓돈을 찔러 줘서라도 조ㆍ중ㆍ러 3국 접경지대를 빠져나가 동해로 접어드는 게 안전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삿갓을 쓴 이는 두 번 다시 못 볼 백두산 천지에서 정화수라도 떠놓고 안전을 빌어 보자고도 했다. 밤새 무슨 꿈을 빌었을까.

애초 계획대로 감행하기로 했지만 압록강 두만강 건널 때는 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음 졸여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백두산을 밤새 넘었다. 삼지연폭포는 아직 거센 물줄기를 뿜어내며 보랏빛 무지개를 선보였다.


북포태산, 남포태산, 관모봉으로 숨어들어 숨죽였다. 함께한 군상들은 체력도 문제며 세상살이 경험도 다양하다. 지리도 빠삭하지 않아 걱정이었다. 세가 약할 때는 뿔뿔이 흩어져 몰살을 피하였다가 때가 되면 게릴라처럼 한 데 모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여기서 더 쪼개면 대열 자체가 무너지는지라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하는 게 상책이다.

a 자작나무와 낙엽송은 윗쪽에 많습니다. 자작나무를 타고 싶다는 시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자작나무와 낙엽송은 윗쪽에 많습니다. 자작나무를 타고 싶다는 시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 김규환

사심 없이 살아도 훼방꾼은 있는 법이다. 얼굴빛이 다르다고 차별하고 키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다고 야단들 하지 않던가. 더군다나 이들이 택한 멀고 험난한 길은 백의민족이 단일 핏줄임을 자랑삼아 얘기하니 이목구비가 조금만 달라도 영 차이가 큰지라 과업을 완수하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들어 보란 듯이 사람들 마음에 자리 잡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란 걸 안다.

세상사 시작은 늘 미미하다. 숫자도 보잘 것 없었다. 세가 워낙 궁하여 대열이라고 보기에도 우습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작당을 하였다고나 할까. 훈련되지 않은 마음으로만 뭉친 터라 더위 하나 못 참는 한심한 무리였다.

우두머리는 갖가지 궁리를 다 해보았지만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백두산호랑이를 타고 단걸음에 풍악산 딛고, 두류산에 미끄러지듯 흘렀다가, 박차고 건너 한라산에 홀홀 단신 다다르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서로를 믿어보기로 했다. 힘은 없어도 꾀가 많아 여우로 불리는 친구,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바탕으로 궂은 일 마다하지 않은 곰탱이, 비호처럼 날아 속도전을 일삼는 오공이, 꼼꼼히 챙기는데 남다른 재주를 가진 대원 등 낱낱이 뜯어보면 다들 한 가지씩은 장기를 가졌다. 믿고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벌써 그들은 조그마한 출혈로 국경을 무사통과하지 않았던가.

a 추녀끝 단풍이 유난히 붉습니다. 남이섬에 가서 장군은 못 뵙고 왔네요.

추녀끝 단풍이 유난히 붉습니다. 남이섬에 가서 장군은 못 뵙고 왔네요. ⓒ 김규환

경흥에선 탄가루로 위장하였다. 예부터 철이 많이 나는 무산을 지나며 노약자를 위해 쇠로된 지팡이를 챙겼다. 삼수갑산을 거치자 여기가 그토록 그리던 무릉도원이 아니냐며 아예 눌러 앉자며 꼬드기자 외려 핀잔을 준다. 풍산강아지 컹컹 짖는 통에 북청까지 가는 길은 줄행랑을 치듯 내달렸다. 도착해서는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속으로는 물 한 모금씩 적시고 술맛 좋은 함흥에서 며칠이고 밤 세워 소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 꿀떡 같았으나 내륙은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질지 몰라 마음의 방향을 다잡아 백두대간에 접어들었다. 어떤 일인지 낯익은 풍경이었다. 벌써 누군가 다녀간 듯 응달은 노란손수건이 걸쳐있고 붉은 나무 주위로 옹기종기 모였다가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동무들, 이거 안 되갔시요."
"와 그럽네까 대장 동지?"
"이거 봐요 벌써 누군가 다녀갔단 말이오."
"아, 그러게 말입네다. 화전도 부쳐 먹었시야요."

다들 휘둥그레 뜨고 화들짝 놀란 표정이다. 잠시 새파란 바닷물 보려다 하루 이틀 머문 사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목 좋은 데만을 골라 화전놀이를 하고 갔으니 괜스레 마음이 헝클어졌다. 바빠졌다. 자신들만 행군을 감행하는 줄 알았는데 앞질러간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니!

a 은행잎은 밤에 더 아름답습니다. 내 모레 비가 내리면 도시에도 은행잎이 흩날리겠네요. 책갈피로 쓰면 이보다 좋은 소독약은 없습니다.

은행잎은 밤에 더 아름답습니다. 내 모레 비가 내리면 도시에도 은행잎이 흩날리겠네요. 책갈피로 쓰면 이보다 좋은 소독약은 없습니다. ⓒ 김규환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이상 더 이상은 그들의 정체와 목적을 감출 수 없다. 이들의 임무는 단 하나! 남북 민중 누구에게나 통일 단풍물결을 선사하는 거다. 봄꽃 화신들 작전이 한라산에서부터 시작했지만 한 해가 가도 기대치에 이르지 못했다. 지난 스무날 전 작전회의에서는 북풍한설 몰아치기 전에 날을 잡아 백두에서 과업 성취를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나자는 것이었잖은가.

남하하는데 선봉엔 전나무, 잣나무, 소나무, 구상나무 등 있으나마나한 형편없는 작자들이다. 곧 자작나무, 생강나무, 피나무를 필두로 산벗나무, 쪽동백나무, 엄나무, 오가피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따위와 개오동, 느티나무, 붉나무, 화살나무, 낙엽송이 합류해서 그나마 대열이 갖춰진 거다.

지난한 걸음은 계속되었다. 호랑이 목덜미를 빠져나와 등줄기를 타는데 유독 원산 명사십리 앞이 환히 반짝거렸다. 좌우로 굽어보다가 필시 앞질러간 행자들과 겹치기라도 할까봐 방향을 서쪽으로 돌렸다.

강원도와 함경남도, 평안남도, 황해북도 경계를 넘나들다가 평안남도에 다시 들러 평양특별시 강동군 약수로 가는 데는 사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곳이 북에서 그토록 물맛이 좋다고 장군이 말했다는 곳이다. 소문대로였다. 두어 모금씩 나눠 마시자 심산유곡을 헤매며 쌓인 피로가 싹 가셨다.

a 느티나무도 노랗고 빨갛답니다.

느티나무도 노랗고 빨갛답니다. ⓒ 김규환

그들 걸음이 느리다지만 사람이 날 듯 뛰어야 따라올까 모르게 빠르다. 내친김에 달리면 묘향산까지 가는데 하루 걸음도 안 되지만 첫 공연은 사람 많은 곳을 택하기로 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거리 양쪽으로 도열하여 색색이 오린 종이꽃수술을 흔들며 맞아주면 분위기 잡는 데는 최고 아닌가.

유랑극단을 자처하기로 했다. 을밀대에선 백지로 쓴 편지를 대동강 강가까지 가지고 나가 찬란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띄웠다. 고니가 물어 가면 더 빠를 성 싶지만 그냥 종이배처럼 흘려보냈다. 만경대에선 자발적인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오후 서너 시가 되자 연기 하나 없는 평양 시가엔 불이 났다. 북쪽 아가씨 볼이 울그락불그락 하다. 청년은 뭐라도 훔쳐 먹다가 들킨 양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인심도 넉넉하여 온반과 랭면을 먹고 싶은 대로 내오니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담쟁이 줄을 잡고 한바탕 난장을 펼치고 나자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듯싶었다.

명색이 평양 아닌가. 머무르고 싶어 행장을 푼 게 아니다. 워낙 흥에 겨워 세상만사 잊고 남녘 영수가 밟고 지나간 자리를 죄다 따라가 보았고 낙엽과 눈을 쓸지 말자고 한 소설가를 만나고, 곳곳에 수천 년 전에 살다간 민족의 뿌리를 보다가 하루 이틀 지내다보니 지체한 것뿐이다.

"이 정도면 되지 않갔시요?"
"서둘러야겠소. 이러다 길이 막힐지도 모르잖소."

그들의 우려는 이어진 거나 마찬가지인 비로봉과 대청봉에서 열릴 남북화합대잔치가 촉박해서가 아니다. 그 모임이야 소 떼 몰고 온 그 양반 덕에 몇 년 째 별 탈 없이 열리고 있잖은가.

a 잣나무와 밤나무 아래에 생강나무가 노란 옷을 입었습니다. 화살나무, 참빗살나무는 거의 비슷합니다.

잣나무와 밤나무 아래에 생강나무가 노란 옷을 입었습니다. 화살나무, 참빗살나무는 거의 비슷합니다. ⓒ 김규환

그보다 더 큰 난관은 155마일 휴전선이었다. 황주에 들러서는 사과나무에 연지곤지를 살짝 찍었다. 고요만 감돌던 전선엔 어찌나 단단히 빗장을 걸어뒀던지 옷이 찢기는 건 고사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당장 철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하고 파열구를 내기는 힘들어도 돌파구는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라니, 노루, 사슴이 누차 감전되어 사람보다 먼저 짜릿짜릿한 경험을 했다. 애초 자유로이 위아래를 오가던 짐승이 사람살이 어림 반 푼어치도 모르지만 몸이 움직이는 대로 가면 언젠가는 왕래하는데 아무 불편이 없으면 그게 통합 아닌가라며 길을 냈다. 서로 다르지만 차이를 인정하고 빈번히 제집 드나들 듯 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정황이 어떠냐고 철없는 철새에게 물어보니 무관심의 극치다. 하여 한 때 베어졌다가 공허한 뜰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버드나무, 억새, 갈대에게 함께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겠다고 한다. 그들은 어차피 내년에 다시 움을 틔워 보란 듯이 쑥쑥 자랄 것이니 자신을 밟고 가라고 했다.

미안했지만 그 방법밖에 없다. 칠흑 같은 적막강산에 들불을 놓기로 했다. 횃불이 켜지자 평양에서 합류한 수양버들, 갯버들, 조선소나무가 앞장섰다. "타다닥 탁탁!" 활활 타며 얼었던 몸을 녹는다. 마음과 함께 철선도 붉어지더니 이내 녹아내렸다.

철의삼각지대 철원평야 곡간이 열려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 난데없는 불꽃놀이에 멀리 중강진에서 내려다보고 거제에서 올려다보았다. 누대에 남을 것 같던 자물통이 열린 듯 기뻐했다. 당단풍, 애기단풍, 고로쇠, 상수리, 가래나무를 거느리고 내친김에 등줄기를 탔다.

a 해강이, 솔강이와 아내와 함께 어린이집 나들이를 떠난 지난 일요일 남이섬에서 한 장 찍었답니다.

해강이, 솔강이와 아내와 함께 어린이집 나들이를 떠난 지난 일요일 남이섬에서 한 장 찍었답니다. ⓒ 김규환

동쪽으로 향한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곳곳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제 누가 진두지휘를 하는지 알 수도 없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을 거두자 뒤따라오는 대열이 백리가 넘었지만 군중들은 마음으로 발걸음을 찍었다.

더디게 갈빗대를 기어올랐다. 멀리 하늘이 내린 선경 금강산이 운무 사이로 드러났다. 구름위에 떠서 내려다본 경치는 장관이다. 해금강 푸르디푸른 바닷물에도 오색찬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빨주노초파남보'로도 모자라 '빨다주귤노노연풀녹초청바파감남남보붉자연'으로 수놓았으니 총천연색이다.

새빨갛고 다정한 주황에 귤껍질 노랑 연노랑 바닥엔 새로 돋은 풀, 초록이 동색으로 모였다. 색동저고리까지 더해지니 자연 빛에 이승에 있는 모든 색감이 눈에 들어왔다. 골짜기마다 소박한 도시락을 싸와 식후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럽다. 남남북녀 어울려 짝을 짓느라 바쁘다.

기암절벽과 일만이천봉 오만가지 나뭇잎이 풍악을 울렸다. 덩달아 대원들은 선남선녀와 어깨동무를 하고 빙빙 돌았다. 앞산 설악 풍경도 매한가지다. 오대산 상원사동종이 은은하고 노랗게 울려 퍼졌다. 깍쟁이 서울사람 높은 건물 으스대지 않았다. 명태 떼도 신이 나서 춤을 추었다.

낙엽비가 내리더니 쌀쌀해져 얼굴은 더 뽀얗게 갓 시집온 색시마냥 발그스레하다. 래프팅을 하여 바다로 흘러간 개오동, 바짝 엎드려 졸참나무 잎을 타고 미끄러져간 생강나무, 책갈피에 고이 모셔져 떠난 붉디붉은 단풍과 은행잎은 즐거웠다.

a 감잎이 철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물 속에 있으면 오래 보존이 되더군요. 비맞은 단풍 잎이 마르다가 펴질듯 말듯 합니다.

감잎이 철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물 속에 있으면 오래 보존이 되더군요. 비맞은 단풍 잎이 마르다가 펴질듯 말듯 합니다. ⓒ 김규환

한사코 넋이 나가 떠날 줄 모르던 대열을 추슬렀다. 밟히는 게 거름이 되겠다고 먼저 떠난 나뭇잎 양탄자를 깔아 놓았다. 높새바람 거칠게 불더니 하늘하늘 날리며 창공을 가르매 한결 가벼운 마음이다. 우린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만 내달렸다.

대도시에선 버즘나무 플라타너스와 칠엽수 마로니에, 용문사에선 은행나무를 홍보대사로 보내왔다. 산자락마다 대낮엔 봉화를 올렸다. 문장대를 지나 화양구곡, 단양팔경 물들이고 소백산 희방사에 다다랐다. 계룡산에 첫닭 울자 떠난 길 쉬지 않고 남진을 계속하니 나흘 만에 덕유산에 다다랐다. 어디를 가든 산천초목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사람들은 한 톨이라도 흘릴까봐 이삭을 줍고 있다.

허리 내장산에 이르자 방장산 사람들과 팔공산, 무등산 사람들에 미처 다 보지 못해 아쉽다는 수원과 개성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절정이었다. 오랜만에 본 잔치마당에 가장 가까이 있는 전주에선 비빔밥을 수백 수천 가마솥에 푸짐하게 차렸다. 오방색이라 식욕이 더 당겼다.

주근깨 있지만 감나무 잎에 조선팔도 사람, 캐나다 사람들도 조선한복 한번 입어보겠다고 찾아왔으니 백양사 애기단풍도 날아갈 듯 기뻤다. 넉넉한 인심에 고만고만한 낮은 산, 풍요한 들녘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다. 가까이 담양에선 메타세콰이어 깃이 바람에 일렁였다.

인산인해라 어깨춤 절로 춰대니 염원은 성취한 듯하여 먼 길을 떠난 친구들 가슴마다 뿌듯했다. 통일단풍물결로 하늘거렸다. 마음을 홀딱 빠지게 했으니 남서남북이 이웃이 되었다. 달포 진행된 꽃보다 아름다운 화려한 여행이 아쉽게 끝나가고 있다. 벌써 백록담 아래서도 층층이 나눠 서서 우리를 반기고 있다.

장흥 정남진(正南津)에선 모든 장비를 내려놓고 한 시름 덜었다. 말끔히 씻으니 피로가 밀려와 발 쭉 뻗고 곤한 잠에 빠졌다. 초죽음이 되어 영영 일어날 줄 모르는 일행은 저승으로 떠나며 한 가지 소원을 남겼다.

"통일, 멀지 않습니다. 마음에 단단히 걸어둔 자물쇠통을 열어보세요. 다녀보니 약간 차이는 있어도 하나됨이 훨씬 큰 이득이 되는 세상입니다. 더 늦추면 후회할 날이 올 겁니다. 우리 단풍만 닮으면 좋겠어요. 먼저 통합하고 차차 토론하는 길도 있잖아요."

a 낙우송과 메타세콰이어 뒤쪽으로 흙집이 보이네요. 한 동안 머무르고 싶은 풍경입니다. 남이섬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담양에서 순창으로 가는 국도변도 끝내줍니다.

낙우송과 메타세콰이어 뒤쪽으로 흙집이 보이네요. 한 동안 머무르고 싶은 풍경입니다. 남이섬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담양에서 순창으로 가는 국도변도 끝내줍니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요즘 www.고향i.com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 원고료는 인터넷고향신문을 만드는데 활용합니다.

덧붙이는 글 요즘 www.고향i.com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 원고료는 인터넷고향신문을 만드는데 활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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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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