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배추 뽑아가신 분 외상이네요, 갚으세요"

농촌에서 경고 팻말이 없어지는 날이 왔으면...

등록 2005.11.07 10:03수정 2005.11.09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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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지나 산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큰 기쁨이다. 촌에서 태어나 촌에서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을 김장철쯤 굵고 기다란 왜무를 쭈욱 뽑아, 햇빛을 받아 초록색으로 변한 무대가리에 엄지손톱을 넣어 쭉쭉 벗겨먹던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거의 모든 농사에 실패하셨지만 배추농사 만은 성공하셨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속이 꽉 찬 배추를 만드셨다. 이맘때쯤이면 배추 속을 더 꽉 채우기 위해 온 식구가 배추밭에 모여 지푸라기로 배추를 하나씩 하나씩 묶었다. 그게 전부다. 수천 수만 포기 배추농사를 지었지만 배추밭에 경고 팻말을 세웠던 기억이 한번도 없다.

지금, 그 옛날 내가 배추 묶던 그 시절과 비교해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 크지도 않은 배추밭, 또는 호박밭, 들깨밭까지 나름대로 머리를 짜낸 듯한 나쁜 사람을 응징하는 팻말들이 여기 저기 서있다는 것이다. 그 경고문을 볼 때마다 농심을 이해하며, 한편으론 왜 이리 되었을까 씁쓸해 사진 찍는 것조차 겁이 난다. 농작물을 훔쳐갔을 때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애교 섞인 경고문이 제일 많으며 농작물을 도둑질당한 주인일수록 경고의 강도는 높아진다.

a "경고, 농작물 손대는 인간 고발조치"

"경고, 농작물 손대는 인간 고발조치" ⓒ 권용숙

a "농약 소독했음"

"농약 소독했음" ⓒ 권용숙

a "농약 살포 위험 호박, 잎 손대지 마시오"

"농약 살포 위험 호박, 잎 손대지 마시오" ⓒ 권용숙

a "채소절도범 검거 시 현상금 100만원 * 연락처 뒷면참조"

"채소절도범 검거 시 현상금 100만원 * 연락처 뒷면참조" ⓒ 권용숙

a "농작물에 손대는 년놈들은 절도죄에 고발함 주인백"

"농작물에 손대는 년놈들은 절도죄에 고발함 주인백" ⓒ 권용숙

a "밭에 들어오는 사람은 범칙금 100만원"

"밭에 들어오는 사람은 범칙금 100만원" ⓒ 권용숙

a "무, 배추 뽑아 가신 분, 외상이네요. 갚으세요. 만약 안 갚으면 3대안에 양상군자가 나타나 가문의 빛이 될거요. 무45*1000=45000원 배추5포기*1000원=5000원"

"무, 배추 뽑아 가신 분, 외상이네요. 갚으세요. 만약 안 갚으면 3대안에 양상군자가 나타나 가문의 빛이 될거요. 무45*1000=45000원 배추5포기*1000원=5000원" ⓒ 권용숙

배추 몇 포기 경고문 옆엔 배추를 다듬은 쓰레기인 듯한 배춧잎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이웃밭에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집 주인이 농사를 잘 지어 이 근방에서 배추가 제일 좋았는데, 엊그제 밤에 누가 배추와 무를 많이 뽑아 가버렸다. 이러다 김장도 못하고 다 뺏기는 거 아닌가싶어 급히 포기도 덜 찬 나머지 배추, 무를 뽑아 김장을 해버렸다고 한다."

아울러 김씨는 "해마다 일정량의 호박이나 배추, 무 등 손실이 있는데 올해는 배추 값이 비싸다보니 더 심해진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범죄자들은 자기가 범죄를 행한 곳을 꼭 다시 한번 가본다는. 그 외상(?)으로 배추 무 가져간 사람이 지나다 이 팻말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3대안에 양상군자(梁上君子,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도둑을 가리키는 말)가 나타나지 않도록 무, 배추 값 5만원을 꼭 갚길 바란다. 그래서 밭에 이런 팻말들도 점점 없어지길 바란다.


a "푸른 마을 작목반 독도를 사랑합니다"

"푸른 마을 작목반 독도를 사랑합니다" ⓒ 권용숙

마지막 팻말을 찍고 돌아오는 길, 오래 전부터 붙어있다 찢겨진 커다란 포스터가 그래도 웃음 짓게 만든다. '독도를 사랑합니다'

그래요, 독도를 사랑하는 농부들이 피땀 흘려 가꾸어 놓은 농작물에 절대 손대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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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용숙

덧붙이는 글 | 밭을 지날 때마다 꼭 만원짜리 한장을 넣어갑니다. 무 밭을 지날 땐 저도 자꾸 무 하나 뽑아 벗겨 먹고 싶어 집니다. 그리고 우리밭이 아니란 걸 알게 되지요. 그래서 그때그때 푸성귀나, 토마토, 상추 등을 밭에서 직접 사가지고 오려고 돈을 가지고 다닙니다. 오늘은 노지에 자라는 붉은 꽃상추를 한봉지 직접 뜯어 왔습니다. 2000원이에요. 하루종일 상추쌈 싸먹느라 입이 아프지만 참 잘 먹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밭을 지날 때마다 꼭 만원짜리 한장을 넣어갑니다. 무 밭을 지날 땐 저도 자꾸 무 하나 뽑아 벗겨 먹고 싶어 집니다. 그리고 우리밭이 아니란 걸 알게 되지요. 그래서 그때그때 푸성귀나, 토마토, 상추 등을 밭에서 직접 사가지고 오려고 돈을 가지고 다닙니다. 오늘은 노지에 자라는 붉은 꽃상추를 한봉지 직접 뜯어 왔습니다. 2000원이에요. 하루종일 상추쌈 싸먹느라 입이 아프지만 참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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