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화 박물관 내부, 김병화가 사용하던 테이블과 의자김준희
1937년 한인들의 강제이주는 비밀리에 진행됐다. 출발하기 하루나 반나절 전에 사람들에게 알렸고, 한 객차에 4가족씩 탄 채 약 18만 명의 한인들이 기차로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고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많은 아이와 노인들이 죽었다. 기차가 이동 중에 멈추면 죽은 사람들을 땅에 묻고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항의했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어딘가로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이동한 후에 도착한 곳이 바로 중앙아시아였다. 지금의 카자흐스탄의 우스토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인근이 그 주된 지역이다.
네 가족씩 탔다는 객차. 화장실도 없는 그 객차는 답답하고 더럽고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이 어디로 왜 이동하는지, 언제까지 기차를 타고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였을 것이다.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김병화는 그 이동 도중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불안한 생각과 감정들을 그냥 묻어 두었을까.
난 김병화의 동상 앞에 섰다.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싶었다. 박물관 안에서 본 글귀처럼 김병화는 분노를 억누른 채 이곳을 새로운 조국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당시에 김병화가 보았을 그 벌판을 지금 나도 보고 있다. 전에는 황무지였던 이곳에 이제는 목화밭과 포장도로와 전봇대가 들어서 있다.
한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오직 벌판과 갈대밭뿐이었던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한인들은 절망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의 한인들이 집을 짓고 물길을 대고 농사를 하고 결국 노력영웅이 되기까지 지탱해 준 힘은 바로 그 분노였을 것이다.
박물관의 바깥에서 몇몇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우즈벡인인지 고려인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라도 이 아이들이 한글을 알까 싶어서 우리말로 말을 붙여 보았지만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어리둥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넓은 농장은 웬지 썰렁한 분위기였고, 아주머니의 말처럼 아이들만 눈에 보였다. 판잣집과 현대식 양옥과 교회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는 이 농장. 한쪽에는 학교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도 있었다. 한때 구소련으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았다는 이곳은 이제는 젊은이들이 떠나가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곳의 고려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갈까? 후에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이 지역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우즈벡이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해당 국가에서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 차별을 받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것들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