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파이>가 돌아왔다

<라이파이> 동호회 모임에서 김산호 화백을 만나다

등록 2005.12.03 17:50수정 2005.12.0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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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 전 전화가 왔다. 네이버 '만화와 추억' 카페 주인장, 오경수씨다.


"라이파이 모임에 오세요."
"가지요"

가슴이 차오른다. 추억이 되돌아온다. 그리움에 목이 멘다.

그리움은 밀린 숙제 같다. 세월이 가면 쌓여가니.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가 어느 날 해답을 다 알게 되는. <라이파이>는 소년의 추억이고, 다가갈 수 없는 미래였다.

춥고 배고플 때, 나는 만화 가게를 지키는 아이였다. 아이들이 내게 건네는 십 환 이십 환... 그것이 우리 집의 생계 밑천이었다. 1959년 초등학교 6학년인 나는 가게의 매니저였다. 내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는 만화만을 가게에 들여 놓았다. 내가 아니라면 아니었다. 라이파이는 내가 "예", "아니오" 할 수 있는 만화가 아니었다.

만화는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배달하였다. 아저씨는 내 입에서 나오는 "예"에 만화를 부리고, "아니오"에 만화를 가지고 갔다. <라이파이>가 아이들 입에 오르내린다. 내가 학교에서 올 때는 아이들도 올 때였다. 학교 간 동안에 몇 권의 만화책 신간이 들어온다. <약동이와 영팔이>, <날쌘돌이>, <라이파이>... 나는 남보다 먼저 신간을 볼 권리가 있는 가게집 사장의 아들이다. 을지로 4가에서 충무로 4가 사이의 예관동, 지금의 중구청 정문 자리. 가겟집 소년의 꿈은 만화가였다.


예관동에서 함께 살고 같은 영희국민학교를 다녔던 소년 최인호는 소설가가 된다. <라이파이> 같은 과학 만화가 준 영감이 그의 천재성에 불꽃을 피었으리라. 황우석은 <라이파이>를 보며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전등이 때때로 나간다. 석유 남포등을 켜던 가게에 한겨울 연탄난로에 물이 끊는다. 우리의 힘든 세월은 영원히 끝이 안 나는 듯하였다. 소년들의 꿈은 만화 속에 있었다. 라디오가 귀하던 시절에 큰길가 전파사에서 <황성 옛터>가 흘렀다. <라이파이>는 황성 옛터가 아니리 미래의 성이었다.


기다리던 날, 12월 2일 오후 6시가 지났다. 나는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내렸다. 밤은 겨울 맛을 본때 있게 보이며 서슬이 퍼랬다. 헌법재판소 건물을 앞으로 돌고 뒤로 돌면서 <라이파이>를 찾았다. 모임장소인 로마네 꽁띠로 가는 길 전봇대에 라이파이가 붙었고, 담벼락에도 붙었다. 이미 로마네 꽁띠에 사람이 가득하였다. 100여 명이 될까. 나는 사람 틈으로 비비고 들어선다.

a <라이파이> 동호인들에게 김산호 화백이 <라이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라이파이> 동호인들에게 김산호 화백이 <라이파이>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 황종원

라이파이 김산호 화백이 40년 세월을 말한다.

"미국의 슈퍼맨은 아직 살아 있지만 라이파이는 오래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암담했던 때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라이파이를 만들었는데 그들이 벌써 50~60대가 돼 죽은 영웅을 부활시키겠다고 하니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모인 얼굴 얼굴은 5060들. 라이파이를 보고 자랐던 소년들. 김 화백의 이야기에 저마다 신명나고 다들 자리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김 화백에게 다가간다.

"김 선생님. 저는 40여년 전에 선생님을 만날 꿈을 꾼 소년이었습니다. 오늘 뵙고 큰 절을 드립니다. 그리고 여기 선생님에게 라이파이 그림을 하나 받으려고 새 스케치북과 만년필을 준비하였습니다. 소년의 꿈을 들어주시겠지요?"

a 김 화백이 라이파이를 그려준다.

김 화백이 라이파이를 그려준다. ⓒ 황종원

김화백은 껄껄 웃는다.

"라이파이를 하도 오래전에 그려 봐서 잘 될지 모르겠어."

이래서 나의 소년은 라이파이를 가졌다.

a 라이파이와 제비양. 제비양은 김 화백의 부인을 닮았다.

라이파이와 제비양. 제비양은 김 화백의 부인을 닮았다. ⓒ 황종원

잠시 뒤, 라이파이 동호인 회장 박재동씨가 동호인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른다. 누구는 만화정보센터 관계자, 누구는 자영업자, 누구는 의사, 누구는 조각가, 누구는 시인, 누구는 탤런트…. 저마다 라이파이 추억을 말한다.

"책이 헤지도록 보았어요. 그 책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어요. 대한뉴스에 만화가게에 줄을 선 아이들이 나왔다니까요. <라이파이> 전집을 복간본으로 만들려고 해요. 만화영화를 만들면 대박날 것인데 해보세요."

내 차례가 되었다.

"저는 만화가게집 아들입니다. 박재동씨가 부산에서 만화가게를 하였듯이. 저는 서울에서 만화가게를 했지요. 당시에 <라이파이>와 <약동이>는 쌍벽이었어요. 저는 김선생님을 뵙지 못하고, 방영진 선생님에게 펜레터를 보내고 오랜 세월을 띄엄띄엄 하면서도 대화를 했지요. 서로가 팽팽할 때 방 선생님은 <라이파이>를 대단히 의식하셨어요. 이 자리에 함께 계셨으면 좋으련만. 이제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의 역사 작업에 전념하시지만 <라이파이>를 다시 이 시대에 돌아오게 하실 책임이 있습니다."

a 46년 전 십대와 이십 대가 이제 만났으니. 김산호 화백과 옛 독자 황종원

46년 전 십대와 이십 대가 이제 만났으니. 김산호 화백과 옛 독자 황종원 ⓒ 황종원

중학교 2학년 시절에 내가 만화를 그려 팔려고 만화출판소를 다닐 때, 김 화백은 대학생이었다. 우리 또래 중에 여럿은 그 어린 나이에 만화를 그려서 세상에 내곤 하던 때였다. 중학교 2학년 나이 또래 아이들은 만화를 그리고 팔러 다니면서 마치 자신이 너무 늙은 듯하게 느껴질 만큼 조숙하였다. 하물며 대학생은 중학생 수준으로 볼 때, 다가가기 힘든 세대였다.

그 시대의 청춘만화가들 - <라이파이>의 산호, <약동이>의 방영진, <짱구박사>의 고우영, <두통이>의 박기준... 우리 중학생의 사고를 뛰어 넘었다. 그래서 <라이파이>가 새 책을 내면 낼수록 <라이파이>의 내용은 어린 중학생들이 보기에 선악의 구별이 헷갈리는 깊이가 있었다.

박재동 화백은 <라이파이> 큰 줄거리를 말한다. 아주 자세하다. 참지 못한 내가 한 마디한다.

"박선생께서는 어제 라이파이를 다시 한번 더 읽고 공부를 하시고 오셨나봐요."

줄거리를 조금 기억하기에 그의 기억이 부럽다. 내 곁에 자리한 김산호 화백의 부인이 한마디를 한다.

a 김 화백의 부인은 라이파이의 상대역인 제비양이라고 동호인들은 일제히 소리친다.

김 화백의 부인은 라이파이의 상대역인 제비양이라고 동호인들은 일제히 소리친다. ⓒ 황종원

"어린 시절에 본 만화 내용이라 잘들 기억을 해서 놀래요. 선생님은 잊고 있지만 만화를 본 세대는 잊지 않아서 놀랜다고요."

한복 차림 고운 신엔지 여사는 신랑 자랑에 으쓱이신다. 김화백과 부인 신여사 이야기가 궁금하였다.

"어떻게 만나셨어요?"
"저 분이 나에게 홀딱 빠졌지, 머."

그럴 밖에. 신 여사의 표현대로 "나는 오땡이고 저 분은 육땡이니까". 그런 나이 차이면 각시가 얼마나 예쁘랴. 사람들 사이사이에 부인의 걸음과 웃음이 아름답고 활발하다. 누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황우석 교수도 어렸을 때 <라이파이>를 보고 컸다고 합니다.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고, 우리의 희망입니다. 지금 황 교수가 궁지에 빠졌는데, 황 교수가 미국의 교수였다면 미국 언론이 황교수를 이렇게 대접을 했을까요. 우리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황 교수를 적극 지원하고 응원하여야 합니다."

다들 박수, 손바닥이 아프다.

a 모임 뒤, 김 화백이 <라이파이> 애독자였던 황우석 교수에게 꼭 힘 내라는 메일이나 글을 보내 달라자 부인은 손을 잡고 약속을 해주었다.

모임 뒤, 김 화백이 <라이파이> 애독자였던 황우석 교수에게 꼭 힘 내라는 메일이나 글을 보내 달라자 부인은 손을 잡고 약속을 해주었다. ⓒ 황종원

"사모님, 들으셨지요. 황 교수가 어린 시절에 <라이파이> 독자였어요. 지금 황 교수는 참으로 외로울 것이에요. 오늘 모임 뒤에 집에 가시면 선생님께서 황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던지 혹은 서울대 의과대학 홈피에 글을 올이시든 꼭 기운 내라고 격려의 말씀을 올리도록 해주세요."

"어머 좋은 방법이네"하며 여사는 손뼉까지 친다.

"저 분도 얼마나 걱정을 하시는지 몰라요. 방법을 몰랐어요. 그렇게 할게요."
"꼭입니다. 약속의 악수를 하셔야 해요. 자, 우리 약속."

어린 시절 <라이파이> 독자와 김산호 화백의 부인은 손 잡고 약속한다.

a 40여 년 전의 만화가게집 아들들이 모였다. 박재동 화백과 기자.

40여 년 전의 만화가게집 아들들이 모였다. 박재동 화백과 기자. ⓒ 황종원

박재동 화백에게 잠시 틈이 났다.

"지난 번 선생님의 만화 내 사랑에서 방영진 선생님에 대한 내용을 보고, 방선생님하고 연락이 되었지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 후 방 선생님과 연락을 하고 지날 때 박 선생님이 방 선생님을 가끔 찾아뵈었다는 말씀을 듣고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서로 약동이를 좋아하는 사이.

a 시골 풍경 속을 기쁨과 슬픔의 우편물을 가지고 달리는 빨간 자전거의 김동화 화백은 소년 처럼 늙었다.

시골 풍경 속을 기쁨과 슬픔의 우편물을 가지고 달리는 빨간 자전거의 김동화 화백은 소년 처럼 늙었다. ⓒ 황종원

내 곁에 학자 같고 또는 청학동에서 온 듯 머리를 뒤로 꽁지머리를 한 노년이 수줍게 앉아있다.

"여사님. 저 분이 누구예요?"
"<빨간 자전거>의 김동화씨를 몰라요?"
"<빨간 자전거>를 잘 알지요."

나는 그만 김동화 화백을 껴안는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안습니다. 신문에 연재될 때, 세밀화 그림과 시골 풍경을 가슴 저린 감동으로 보았어요. 다른 어떤 만화가보다 선생님을 꼭 뵙고 싶더니, 반갑습니다."

나는 김동화 화백이 김산호 화백에게 주려고 가져온 <빨간 자전거> 만화책을 탐내고 본다. 김동화 화백은 말없이 책에 서명을 하고 다시 챙긴다. 내가 갖고자 하면 서점에 가서 사야지. 순간 품은 욕심이 쑥스럽다.

a 그 시절 <라이파이> 독자 전유성씨가 함께 섰다.

그 시절 <라이파이> 독자 전유성씨가 함께 섰다. ⓒ 황종원

나는 공연히 말을 걸고 싶다.

"방영진 선생님을 생전에 만나 보셨는지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눈은 김산호 화백의 <라이파이>쪽보다 <약동이>와 <영팔이> 쪽에 가까운 김동화 화백이다.

"생전에 못 뵙고 돌아가신 뒤 영안실에 갔었지요."

나는 방 선생님이 돌아간 뒤 그 분의 누님을 통하여 뒤늦게 들었다. 안타깝고 슬프다. 늦은 걸음으로 전유성씨가 모임자리에 들어섰다.

a 전우성씨와 기자와 '만화와 추억'의 주인장 오경수씨

전우성씨와 기자와 '만화와 추억'의 주인장 오경수씨 ⓒ 황종원

내가 껴들어 전유성씨를 김산호 화백 곁에 세워 한 마디를 하게 한다.

"여기 모인 분들 <라이파이> 모르는 분 계세요?"

너무 당연해서 그 말에 사람들이 한차례 떠들썩하게 웃음이 인다. 전유성씨가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옆으로 간다. 그는 라이파이와 약동이에 대하여 훤하게 즐거리를 말한다. 공부는 언제하고 만화만 보았누. 나는 걱정을 한다. 만화가게 주인집 아들이면서.

@IMG12@그에게 사진 한 장 청하는 동안 내 카메라는 바로 충전이 안된다. 이럴 때 참고 있으면 전유성이 아니지.

"좋은 카메라는 바로 터지는데. 성능이 쳐지면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한다고.(낄낄)"

나도 함께 웃으면 말을 속으로 삼킨다. (전 선생. 이 카메라는 선생이 라디오시대 엠시를 할 때 내 글을 낭독한 뒤 상품으로 준 바로 그 디카라오.)

약동이와 영필이 네이버 '만화와 추억' 주인장인 오경수씨는 함께 한 자리에서 <약동이> 이야기에 목이 터진다. 남의 잔치에서 <약동이>를 말하는 그의 순수가 나보다 강하다. 그러나 외롭다. 내가 함께 거들지만 우리 둘의 합창은 <라이파이>에 묻힌다. <라이파이>와 더불어 한 시대에 있던 이름을 말하면서 우리의 그리움을 채우니 좋지.

동호인들이 돌아가면서 말을 하면 김산호 화백이 껄껄 웃음소리가 시원하고 밝다.
잃었던 내 아이 <라이파이>를 찾아준 이들이 고맙다 함이 아닌가. 정치를 말하지 말라. 만화만 말하라. <라이파이>만 말하라. 우리가 꿈꾸던 시절만 이야기하자. 다들 그렇게 말하고 <라이파이>만 말한다.

사방을 돌아본다. 밤의 어둠이 두텁다. 이곳의 흥분과 유쾌한 만남을 잠시 떠난다. 내 눈이 머무는 공간에서 세월은 40여 년 전으로 간다. 만화 책방이다. 아이들이 저마다 라이파이 만화를 들고 있다. 모두 함께 꿈이 이루어지기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물론, 먼 훗날 아이들은 이렇게 되리라.

누구는 대통령이 되었고, 누구는 장군이 되었고. 누구는 만화가, 누구는 시인, 누구는 배아줄기세포연구 교수, 누구는 IT 기업 사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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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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