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싫은 욕이라도 실컷 들었으면..."

어머니와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길③

등록 2005.12.03 17:47수정 2005.12.0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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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구들은 소인국테마파크를 뒤로 하고 곧장 차머리를 돌렸다. '산방사'란 곳이 그 다음 목적지였다. 딱히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가까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가다 보니 그곳으로 가게 됐다. 산방사는 평범하게 솟아오른 산봉우리 중턱에 큰 동굴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또한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생수도 마실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를 상징하는 말, 그리고 저 멀리 '산방사'가 보입니다. 저 중턱에 있는 소나무 안쪽으로 큰 동굴이 있고 그곳에서 바위틈 생수가 떨어진다고 하네요.
제주도를 상징하는 말, 그리고 저 멀리 '산방사'가 보입니다. 저 중턱에 있는 소나무 안쪽으로 큰 동굴이 있고 그곳에서 바위틈 생수가 떨어진다고 하네요.권성권
그 산방사 앞에는 용머리 해안과 하멜 표류 선박이 든든하게 서 있었다. 모두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었다. 용머리 해안은 나름대로 전설도 갖고 있었다. 옛날 진시황제가 용머리 해안 둘레에서 유명한 왕이 태어날 것이라며, 그 싹을 미리 잘라 버리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토록 이름 난 곳인데도 울 엄마는 그곳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돌계단도 많았고 걷기에도 무척이나 가팔랐기 때문이다.

'용머리 해안' 모습이에요. 사람들이 줄기차게 저 곳을 들락날락했어요.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태양 빛이 내리 쬐고 있구요. 정말 멋지지 않나요.
'용머리 해안' 모습이에요. 사람들이 줄기차게 저 곳을 들락날락했어요.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태양 빛이 내리 쬐고 있구요. 정말 멋지지 않나요.권성권
하멜 표류기에 서 있는 큰 선박은 네델란드 출신인 핸드릭 하멜이 몰고 온 스페르웨르호이다. 물론 지금 서 있는 것은 그 옛 모습을 떠올리며 개조한 것이다. 하멜은 당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당시 제주도 대정현 지역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13년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생활을 하며 틈틈이 일기를 썼는데, 그것이 유럽세계에 알려지면서 우리나라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축구감독 히딩크가 네델란드 출신이라 그런지 그 하멜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멜 표류지 옆에 서 있는 스페르웨르호 선박이에요. 얼마나 크고 위용차 보이던지, 그 기세가 놀랄 정도였어요. 실제로 이만한 배를 타고 왔는지는 모르게지만 당시 제주도 땅이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어요. 울 엄마도 이 사진을 보고 입을 딱 벌렸지 뭐예요.
하멜 표류지 옆에 서 있는 스페르웨르호 선박이에요. 얼마나 크고 위용차 보이던지, 그 기세가 놀랄 정도였어요. 실제로 이만한 배를 타고 왔는지는 모르게지만 당시 제주도 땅이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어요. 울 엄마도 이 사진을 보고 입을 딱 벌렸지 뭐예요.권성권
나는 그 용머리 해안에 얽힌 이야기와 하멜 표류기를 잠시 울 엄마에게 이야기해 줬다. 그랬더니 울 엄마도 그에 뒤질세라 몇 마디 꺼내고 나섰다.

“와따, 진짜로 제주도가 대단헌가 보다 이.”
“그렇지요. 용머리 근처에서 왕이 태어난다니까요.”
“그랑께야. 외국 사람도 올 정도면 대단해분다야 이.”
“엄마도, 용은 봤잖아요.”
“그랬제, 너랑 같이 봤제. 근데 그것이 이무기 꼬리였잖냐?”
“그랬지요. 우리 집 앞바다 한동산 너머로 올라가는 이무기였지요.”
“그러믄 이곳도 그래불었쓸까?”
“그랬을 수도 있고 또 진시황제가 미리 막아 버렸을 수도 있구요.”
“와따, 그 놈 징그런 놈이다이. 우리나라를 그러코롬 못살게 했승께 이.”

대장금에 나오는 그 '송악산 동굴'이에요. 저 절벽 아래에 큰 동굴들이 무척 많았어요.
대장금에 나오는 그 '송악산 동굴'이에요. 저 절벽 아래에 큰 동굴들이 무척 많았어요.권성권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차머리를 또 다시 돌렸다. 이번에는 <대장금>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 동굴을 찾아갔다. 사극으로 유명했던 그곳은 이른바 '송악산' 동굴이었다. 그런데 송악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멋진 전망대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곳까지는 울 엄마 다리가 용치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봐야 할 곳도 장금이가 수술한 그 동굴이니 그것으로 족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동굴을 둘러보는 것마저도 울 엄마는 내키지 않는 듯했다. 걸음걸이가 결코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은 내리막길에다 돌과 모레가 있는 울퉁불퉁한 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동굴을 그저 보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할 성싶었다.

하지만 울 엄마는 벌써부터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나 혼자만이라도 다녀오라는 눈치였던 것이다. 눈치 빠른 나는 미한하기도 했지만 울 엄마와 아내 대신에 가장 가까운 동굴 두 곳만을 둘러보았다. 물론 그 동굴 안에서 멀리 바닷가를 배경으로 멋진 한 컷 사진도 찍고 왔다.


송악산 동굴 한 곳에서 바다를 보고 찍은 사진이예요. 위쪽 벽에는 풀도 자라고 있었지요. 참 좋았어요. 이 곳은 네모가 나 있지만 다른 동굴은 원처럼 둥글둥글했어요.
송악산 동굴 한 곳에서 바다를 보고 찍은 사진이예요. 위쪽 벽에는 풀도 자라고 있었지요. 참 좋았어요. 이 곳은 네모가 나 있지만 다른 동굴은 원처럼 둥글둥글했어요.권성권
“엄마, 내가 대신 갔다 왔으니까 다음에 사진으로 꼭 봐요.”
“알았다야, 근디 그 동굴이 얼매나 크디이?”
“그렇던데요. 또 한쪽하고 다른 쪽도 이어졌구요.”
“그러면 어디서 찌근지는 모르겄다 이.”
“그렇죠. 저 동굴이 하도 많아서요.”
“근디, 무쟈게 유명허긴 유명헌가 보다이.”
“엄마도 의술은 좀 하시잖아요?”
“다 옛날 이야기제. 동네 사람들 주사 놔 준것이 뭐 자랑이데.”

사실 그랬다. 울 엄마는 시골 촌구석에서 주사를 놔 주기도 했다. 아랫집 윗집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바늘 주사를 꽂곤 했다. 그렇다고 팔뚝이나 다른 데 주사를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가 가끔 아플 때 가르쳐 준 대로, 엉덩이에다만 놓을 뿐이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 엉덩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쫙 꿰고 있을 정도는 된다고 했다. 그러니 달리 명의가 명의이겠는가? 울 엄마가 내게는 명의 중에 명의이다.

어디 그뿐이랴? 내친 김에 울 엄마 자랑을 하나 더 해야 할 것 같다. 울 엄마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는 가히 천재 일만큼 잘한다. 나보다도 훨씬 더 잘하기 때문이다. 나는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수 있지만 울 엄마는 암산으로 모두 해낸다. 그러니 도외지 장사치들이 시골에 드나들며 곡물을 저울로 달아 값을 환산할 때도, 동네 사람들은 전혀 손해를 본 적이 없다. 울 엄마가 집집마다 모두 계산을 맞춰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산에 밝지만 그렇다고 이속을 챙기는 엄마는 또 아니다. 이름 그대로 '순진' 그 자체다. 동네 사람들 아픈 것이나 계산을 잘 해 주지만 그렇다고 돈을 받아 챙긴 적은 전혀 없다. 물론 돈 대신 욕은 많이 밝힌 분이다. 동네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욕은 잘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우리 엄마와 윗집 수원이네 엄마가 참 욕을 잘 했는데 그 분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시자, 단연 울 엄마가 으뜸이 됐다. 하지만 그 욕이란 것도 속에서 성이 나서 하는 게 아니라 말수 자체가 그렇게 욕처럼 됐으니 누구도 말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서귀포 앞바다를 항해하는 어선이에요. 잿빛 바다 위에서 험한 풍랑에 맞서 떠 있는 배처럼, 울 엄마도 저렇게 힘든 세상을 살아 왔겠죠. 그러면서 이제 칠순이 넘어서 그 잘하던 욕들도 점점 적어지는 것이겠구요.
서귀포 앞바다를 항해하는 어선이에요. 잿빛 바다 위에서 험한 풍랑에 맞서 떠 있는 배처럼, 울 엄마도 저렇게 힘든 세상을 살아 왔겠죠. 그러면서 이제 칠순이 넘어서 그 잘하던 욕들도 점점 적어지는 것이겠구요.권성권
옛 어른들이 욕을 하는 것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산다. 울 엄마가 하는 욕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형수들이나 내 아내는 좀체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 같다. 입에서 베물고 하는 말 자체가 욕이니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별별 욕을 다 듣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중재하기에 바쁘다. 그건 욕이 아니라 말이라고….

그러나 그 잘하던 울 엄마 욕도 이번 여행길에 많이 줄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주도 곳곳을 돌고 도는 길목마다 그저 세상을 잠잠히 바라보기만 했다. 예전 같은면 이러쿵저러쿵 한소리를 내뱉곤 했을 텐데 이번 길은 많이 달랐다. 그래서 내 딴엔 불길한 생각도 밀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잘하던 욕을 하지 않고 살면 울 엄마가 금세 이상해지는 것은 혹시 아닐까….

점심 먹을 시간이 가까워졌다. 차머리를 '서귀포' 항구로 돌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이었지만 여전히 내 머리 속에는 욕 잘하는 울 엄마, 그 옛 모습이 가슴에 사무쳤다.

젊었을 적 울 엄마
시골 동네에서 욕을 참 잘했네
불알친구들이 듣기에도 민망한 욕들을 너무 많이 했네
칠순 넘은 울 엄마
이번 제주도 여행길에선
그 거칠고 잘하던 욕을 어찌 못하는 걸까
나이 들면 눈도 멀고 귀도 멀고 말수도 적어진다는데
혹시 그래서 그런 건 아닐까
차라리 예전처럼 듣기 싫은 욕이라도 실컷 들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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