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차 한 대가 굴러 들어왔습니다

막내 동생이 또 훌쩍 떠난다고 합니다

등록 2005.12.24 18:27수정 2005.12.26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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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저녁, 막내 동생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일 다 끝내면 들어 갈려구."
"어딜?"
"전에 얘기했잖아, 그냥 적당한 곳이 있으면 찾아 가야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엄니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사십을 바라보는 막내아들 장가 갈 날을 손꼽고 있는 엄니였습니다. 그냥 잠시 절집 선방 구경 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삭발하고 승복을 입게 될지도 모를 그 앞에서 나는 짐짓 태연하게 물었습니다.

"…그려? 일은 언제 끝나는디?"
"내일쯤에 하던 일 마무리 해놓고 가야지…."

그는 늘 그런 식이었습니다. 큰일을 앞두고도 별 일 아닌 것처럼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훌쩍 떠나곤 했습니다. 지난 여름에도 그랬습니다. 배낭 하나 달랑 둘러메고 티베트에 간다며 불쑥 찾아왔습니다.

"언제 떠날 건디?"
"내일 비행기 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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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산 가는 길 ⓒ 송성영

그렇게 훌쩍 떠나 겨울 문턱에 수염 뒤덮인 얼굴로 불쑥 나타났습니다. 5천 고지가 훨씬 넘는다는 수미산 근처에서 숨이 막혀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때 엄니 걱정 때문에 내내 미뤄왔던 수도자행에 대한 결심을 굳혔는지도 모릅니다.

"내 차는 형이 써."
"잘 됐네, 우리 차 고칠 띠가 많아 고민거리였는디, 오래 끌고 다녔잖어, 잘 됐다, 니 차 끌고 다니면 되겠다. 짐도 많이 실을 수 있구, 그런디 말여, 내가 예전에 산에서 생활할 때 입었던 옷을 아직두 니가 입구 있네…."

"그러네."
"그렇지 잉. 그때 니가 입었던 옷은 지금 내가 입구 있고. 결혼 전이니까 벌써 10여년이 훨씬 넘었구나. 우리가 옷을 바꿔 입은지…."

나는 그를 좀 더 붙잡아 두고 싶어 쓰잘데기 없는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그는 머뭇거림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습니다. 아랫목에 몸 녹일 사이도 없이 사랑방을 나섰습니다. 저녁 먹고 가라는 형수의 섭섭함을 뒤로 한 채 눈길을 나섰습니다. 지프차를 선물로 던져 놓고 산타크로스처럼 눈발 날리는 길을 희죽희죽, 예의 그 맑은 웃음을 흘리며 떠났습니다.

그가 떠나자 허전했습니다. 허전했지만 눈 덮인 능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의 뒷모습이 풀풀 날리는 눈발처럼 가벼워 보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올해 서른여덟, 칠남매 중에 막내인 그는 어릴 때부터 별난 구석이 많았습니다.

그는 중학교에 다닐 때 종종 버스를 타지 않고 홀로 먼 산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황당한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졸업을 몇 개월도 채 남기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부모를 모시고 오라는 통지를 받고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학교에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왜 그만둘려구 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내신 성적도 괜찮고 졸업도 얼마 안 남았는데."
"글쎄 말입니다. 그래두 할 수 없죠, 지가 그만두고 싶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담임선생님은 또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그렇게 그는 자퇴서를 던져놓고 방황의 덫에 걸린 사람처럼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이미 수행자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갑자기 자동차 기술을 배우겠다며 카센터를 들락거리더니 얼마간의 돈을 모아 친구 따라 사업을 벌이겠다며 필리핀으로 획하니 떠나기도 했습니다. 필리핀의 유피 대학에서 영어를 배우고 와서는 한동안 영어강사 노릇을 했습니다. 방랑 끼 다분한 인간이 어디 영어 강사가 체질에 맞았겠습니까?

어느 날, 그는 대로 한복판 빗길에서 자동차가 360도 회전하는 절대 절명의 사고를 당하더니 영어 강사 일을 때려치우고 돌연 절집을 찾아 들어가 처사 노릇을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절집이 내 집이려니 기약 없이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산 생활을 하면서 국선도를 비롯한 이런 저런 선수행을 접했고 멀리 인도 고행 길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의 산 생활은 승복만 걸치지 않았을 뿐 스님네들의 절제된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해부터인가 뜬금없이 목조 주택 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윙윙거리는 온갖 작업 공구들에 작업장까지 갖춰놓고 본격적으로 목수 일에 달려들었습니다. 엄니는 이제야 제 길을 찾았나 싶어 '좋아라' 했습니다.

평생 업으로 삼을 만큼 적성에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그는 부지런히 목수 일 했습니다. 일하면서도 수행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수행을 하면서도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티베트에 다녀와서도 곧바로 일을 시작했고 오늘도 그 일을 하다가 다 저녁에 찾아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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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산이 바라보이는 4천5백고지에 자리한 티벳의 마라사로바 호수라고 합니다. ⓒ 송성영

그가 떠난 뒤 나는 컴퓨터 초기화면에 띄워 놓은 사진에 눈을 박았습니다. 그가 티베트에 갔을 때 찍어온 사진이었습니다. 불교와 흰두교 자이나교와 티베트 불교 등의 수행자들이 성스러운 산으로 여긴다는 성산, 우리에게는 수미산으로 알려진 카일라스 산이 수정처럼 우뚝 솟아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거기 어딘가에서 숨이 막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고갔을 그를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수미산 앞에 섰을 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수미산을 찾은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눈물을 쏟아낸다고 합니다. 순례자들이 수미산 앞에서 흘린 눈물은 수정처럼 맑은 수미산만큼이나 순결했을 것이었습니다. 성스러운 그 어떤 결정체와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탐진치, 탐욕스럽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끼어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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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산(카일라스산) ⓒ 송성영

누군가 욕심 없는 마음을 내는 순간, 그 마음 또한 감염이 되나 봅니다. 나는 그의 눈물을 떠올리는 순간, 뜨거운 기운이 목울대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눈물이 나왔습니다. 숨이 막혀 사경을 헤맸을 그를 떠올렸을 때 역시 눈물이 나왔었습니다. 형제의 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미산 앞에서 흘린 그의 눈물에 대해 솟아 오른 감정은 형제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수행자의 맑은 영혼에 감염된 눈물이었습니다.

소유했던 것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온전히 수행자의 길로 가겠다고 마음을 굳힌 결행, 그 순간에도 아마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자들의 결행은 맑은 영혼의 눈물과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결행이 순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혼탁한 세상을 맑게 정화시켜주는 참된 기운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나는 그 결행의 시작과 끝이 어떤 것인지는 글로 읽고 말로 들어 짐작만 할 따름입니다. 그저 그들이 벗어 놓은 소유물을 주섬주섬 챙겨가며 어쩌다 마음 한 자락 얻어, 그나마 위안을 삼아 봅니다. 그들의 맑음에 합장하며.

덧붙이는 글 | 기사에 올린 사진은 동생이 티베트에서 직접 찍어온 사진들입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에 올린 사진은 동생이 티베트에서 직접 찍어온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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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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