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사람들의 기억과 일상

[섬이야기 22]전남 신안 자은도

등록 2005.12.27 11:57수정 2005.12.2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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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뱃길로 1시간이면 '그 섬'에 갈 수 있다. 암태도와 자은도가 연결되면서 30여 분 단축되었고, 이미 다리로 연결된 인근 안좌도와 팔금도는 다시 암태도와 연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주민 숙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제 신지도와 완도가 다리로 연결되었고, 15일 진도에도 새로운 다리가 개통되었다. 육지는 바다와 어촌을 향해 혀를 내밀며 다가오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자은도를 포함해 암태도, 압해도, 진도 등 4개의 섬만이 '나주목'에 속한 섬으로 언급되어 있다. 30년 후에 기록된 <동국여지승람>에 29개의 섬이 기록되었던 것에 비하면 큰 차이다.

이렇게 국가가 자은도에 주목한 이유는 일찍부터 소금이 생산되었고, 국가에서 필요한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자은도는 한양에서 볼 때는 흑산도와 다를 바 없는 유배지였으며, 배를 짓거나 궁궐 등 국가 주요 건물을 세우는데 필요한 소나무의 배양지로 지정되어 관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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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 남진나루와 암태 북강진 나루를 연결한 다리. ⓒ 김준

죽음도 편하지 않다.

어촌의 급격한 인구감소와 함께 고령화가 심각해 계절적으로 집중된 노동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농사뿐만 아니라 상여를 매는 일도 다른 마을에서 사람을 빌려오거나 상품화된 노동을 사지 않으면 어렵다.

다만 목회활동이 활발한 곳은 교인들 사이에 새로운 '품앗이'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죽음의례도 모두 교회에서 하고 있다. 과거에 마을단위로 이루어지던 품앗이가 인구가 급격하게 줄기 시작하면서 마을단위로 구성하기 어려워지고, 상례를 맡던 '상두계' 등 각종 모임들도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풍속을 대신하고 나선 것이 교회였던 것이다.

자은도의 한 교회는 상여도구를 교회에서 마련하여 교인들에게 제공하기도 하고 있다. 자은도 한 마을에서 만나 노인은 나이가 들고 나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유가 죽어서 아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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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도에 있는 교회 ⓒ 김준

자은도의 섬생활을 좌우하는 것은 마늘과 대파라 할 수 있다. 이들 가격이 섬생활의 삶의 질을 경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은도의 마늘 농사는 6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말부터 대량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해수욕장이 발달한 서부지역의 밭에서는 고구마와 땅콩을 재배하다 최근에는 대파로 전환하였다. 한운리와 고교리 등 김양식을 하는 마을도 있지만 제한적이며 수산업 의존도가 매우 낮은 섬이다.

사월포를 중심으로 어선어업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자은도에서 가장 농사를 많이 짓는 마을은 고장이며, 욕지도를 중심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해수욕장이 발달한 백산과 면전 일대 모래땅에서는 대파와 땅콩 재배가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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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에서 농사가 제일 많은 고장리. 느티나무 아래서 주산물인 마늘을 다듬과 있다(2002. 여름) ⓒ 김준

안좌와 팔금, 암태와 자은을 연결하는 다리가 연결되어 금년부터 안좌도를 통해 자은으로 들어오는 여름 피서객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피서객의 증가가 꼭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네 개의 섬 중 먼 바다 쪽에 자리한 자은도에 해수욕장이 발달해 있는데 피서객들은 안좌도에 내려 4개의 섬을 지나 자은도에 이른다. 겨우 주민들이 받는 것이라고는 해수욕장 인근 마을에서 탈의장을 마련해 받는 물 값이 전부인 실정이다. 오히려 도서간 교통이 좋아지면서 이웃 섬의 마을어장에 들어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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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에 자은 구영마을 양민들이 피해를 당했던 팽나무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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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자은 면장 중에도 한국전쟁기에 좌익들에 의해 수장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 ⓒ 김준

손가락질에 생사가 좌우되었다

암태와 연결되는 은암대교가 만들어진 1995년 이전에만 해도 자은도의 나들목은 남진포구였다. 자은도는 목포보다 20여 일 늦게 수복이 되었으며, 해방 전후에 임자도 다음으로 좌우익 갈등과 피해가 심했던 곳이다. 그 대표적인 곳이 남진포구와 구영마을이다. 남진포구는 일제강점기에 주재소가 있어 해방 후 경찰들이 상주했다. 좌우익 갈등 과정에서 좌익들이 이곳 주재소를 습격하여 탈취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자은도는 한국전쟁 전 3개월 정도 좌익이 치안을 장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과 함께 섬을 빠져나가 부산 등으로 피난 갔던 면과 지서직원을 비롯한 우익성향의 인사들은 목포가 수복되고 난 20여 일 후 10월 초 쯤에 섬에 들어왔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면내 유지들은 좌익들에 의해 수장을 당하는 등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이곳 면장 중에는 당시 수장을 당한 후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도 있다.

우익은 들어온 후 빠져나가지 못한 그리고 좌익색채가 있는 사람들을 보는 대로 테러를 가했다. 다시 자은도에 들어온 경찰을 비롯한 우익들은 마을을 뒤져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구영마을 팽나무 밑으로 모이라고 해놓고 테러를 가하고 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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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람들이 '동원'되어 막아야 했던 자은도 염전, 과거에 자염을 생산했던 곳이기도 하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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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시장의 개방으로 염전들을 새우양식장으로 전환했다. ⓒ 김준

자은도의 백길염전, 대길염전, 욕지염전 등은 이러한 상황에서 면과 지서의 주민독려와 동원에 의해서 막아졌다. 당시 제방을 쌓는 일은 노동력과 자본이 많이 들기 때문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공사가 가능했던 것은 1950년대 초반의 자은도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손가락질 하나에 목숨이 결정되던 시절에 아무 말도 못하고 '동원'되었고, 풀칠할 것이라도 주면 감사해야 했다. 안모씨(1939년생)도 14살 때 지게를 지고 출력을 나가 방조제 공사를 했다. 당시에 "만보"라고 하여 돌을 지고 30번 해야 미국에서 제공하는 통밀 2-3되를 주었다.

기껏 막아가다 조류가 덮치면 다시 처음부터 쌓기를 되풀이해야 하는 어려운 공사였다. 축조공사는 마을별로 가구 수를 고려해 할당해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공사는 '면염전축조공사'라고 불렀는데, 9개리의 이장이 이사로 참여했다. 이사장은 당시 면장이 맡았으며, 이사회는 면 유지들로 구성되었다. 필자가 2002년 만났던 노인은 '면민들이 공포에 떨며 동원'되었다고 기억했다. 둑을 쌓는데 동원되었던 사람들에게 '주'(몫)를 준다고 하였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중에 이 염전은 소유권을 놓고 분쟁에 휩싸여 재판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중국산 소금이 밀려오면서 새우양식장으로 변하거나 폐전되고 일부만 소금을 만들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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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주재소가 있었던 자리(자은 남진나루), 자은도의 출입구로 좌익과 우익이 모두 거점으로 사용했던 공간이다. ⓒ 김준

부서파시로 유명한 사월포

사월포에 파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무렵이다. 필자가 만난 정씨(1932년생, 2002년 인터뷰)는 18세 때 인근 두모리에서 사월포로 이사했다. 그 때 사월포에는 농사를 짓는 네 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후 사월포에 부서가 모여들면서 전국에서 배들이 몰려들어, 사월포에서 상장구지 코뱅이(할미도)까지 이어지는 바다에 3000여 척의 배가 모여들었다.

주로 여수, 마산, 인천, 충청서산, 군산배들로 선원 5-6명의 4-5톤 목선이 주를 이루었다. 부서는 4월부터 6월까지 잡았는데 크고 색깔이 노란색으로 꼬리가 약해 조기와 구별된다. 부서잡이는 사월포에서 20분 거리인 10여km밖인 가무구섬까지 나가는데, 오전 6시 무렵부터 밤 8-9시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그물은 대부분 명주그물이었고 여유가 있는 사람만 나이롱사를 이용하였다. 명주그물은 손으로 떠서 갈나무를 삶아서 먹였는데 이렇게 하면 한철은 사용할 수 있었다. 사리에 고기가 많이 잡히는데 잡은 고기는 배를 따고 다듬어서 목포나 여수에서 온 상고선에 팔았다. 이들 배들은 얼음을 가지고 와서 고기를 가져갔으며 도매로 목포의 상회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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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면 둔장리 독살 모습1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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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 안에서 각만을 설치해 고기를 잡는 주민 ⓒ 김준

사월포에는 부시파시가 시작되면서 원주민 5-6가구와 목포사람들이 차린 10여 개의 술집이 형성되었다. 술집은 '니나노집' 형태로 큰 경우 5-6명, 작은 경우 2-3명의 여자를 두고 장사를 했다. 선원들 중에는 술을 먹고 술값이 없어 잡혀 있으면 선주가 와서 대신 갚아주기도 하였다. 파시철에는 잦은 폭력으로 목포에서 2명이 임시경찰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술집은 모두 뱃사람 상대로 장사를 했으며 선원들이나 주민들 중에는 술집아가씨와 살림집을 차리기도 하였다.

사월포 파시촌에는 술집 외에도 선구점이 3개 있었는데 그물, 닻, 실, 바늘대 등을 팔았다. 대부분 상점들은 잡화와 술집(색시집)을 겸하였고, 2집의 전문잡화상은 식량 등 선 내에 필요한 부식(무, 배추, 쌀)을 제공하였다. 고기잡이를 나가면 배에서 밥을 해먹었는데 물은 마을 여자들이 동이에 이고 가서 팔았으며, 나무는 두모나 고장 등의 다른 동네에서 지게꾼이 와서 팔았다.

나무는 사계절 모두 필요했기 때문에 선주가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꽃게를 대신주기도 했다. 약국은 없었지만 외지인이 몇 가지 약을 파는 가게는 있었으며 환자가 발생하면 구영이나 목포로 나가야 했다. 부서파시는 195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지만 고기가 떨어지면서 파시는 끝이 났으며 강달어가 1-2년 반짝 잡히다 사라졌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흥청대던 파시촌도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제 진입로 공사만 마무리되면 신안의 안좌-팔금, 그리고 암태-자은이 연결된다. 뱃길이 아닌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물론 육지 사람들도 네 섬을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암태도와 자은도는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 이미 많은 집안들이 사돈을 맺은 통혼권으로 친척뻘 되는 섬이다.

인구가 자꾸 줄어들고 있고, 다리가 연결되자 주민들은 두 면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갖고 있다. 지금은 양쪽에 모두 행정기관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자칫하면 새로운 불씨가 될 수 있다. 네 개의 섬이 하나로 연결되었지만 다리 연결 후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책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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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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