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다의 시간'이 좋다

[바다에서 부치는 편지 7]

등록 2005.12.21 15:06수정 2005.12.2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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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간 속에 들어가는 것, 새로운 공간과 만나는 것은 즐겁고 가슴이 뛰는 일입니다. 아마 그런 느낌을 쉽게 맛볼 수 있는 것이 '여행'일 겁니다. 낯선 공간과 시간은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듭니다. 바다나 섬에 가면 그런 기분입니다. 운이 좋아 고기잡이 배라도 타는 날이면, 찬바람을 견디다 못해 얼어 버린 아삭거리는 갯벌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삭거리는 갯벌 속에는 생합이 자라고 있고, 짱뚱이가 잠들어 있습니다.

육지사람들은 시계를 보고 '일'을 하지만, 갯사람들은 '물때'를 보고 바다로 나갑니다. 육지사람들은 '일기예보'를 보고 날씨를 생각하지만, 갯사람들은 새가 나는 것을 보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바다 색깔을 보고 날씨를 예측합니다. 옛날 풍선배를 타고 고기를 잡던 시절에는, 사흘 날씨를 볼 줄 알고, 바다를 볼 줄 알아야 최고로 대우를 받는 선장이었다고 합니다. 하늘을 보고 물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랍니다. 하늘과 바다가 어디 보이겠습니까. 바람, 해, 달, 새 들을 보면서 내일 날씨를 생각하고, 고기가 있을 만한 어장을 예측하는 것이겠지요. 마치 인디언들이 동물들의 행동을 보고 지혜를 얻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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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이 드러난 바다의 낙지잡이(무안갯벌)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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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빠진 갯벌에서 생합을 잡는 어민(부안 계화도) ⓒ 김준

서무 셋 날에는 점심 바구니 들고 개에 간다

'서무 셋 날'은 음력으로 11일, 26일로 열하루, 스무엿새 무렵을 말합니다. 조금으로부터 3일째인 '세 물'을 가리킵니다. 이날은 조석차가 완만하여 조류 유속이 약하므로 낚시어업의 최적기라는 말입니다. 바다고기는 조금을 전후하여 연안으로 들어오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낚시질 등에 좋다는 의미입니다. 갯일을 하는 사람도 이날은 '점심 바구니 들고 개에 간다'고 했습니다. 조석차이가 크지 않아서 작업시간이 짧아 패류채취나 해조류 채취 혹은 김 양식 등이 몹시 일손이 바쁘기 때문이랍니다.

조금, 세물 등은 갯사람들의 달력에만 있는 시간입니다. 그것을 '물때'라고 하지요. 지금은 '조석표'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바닷가에서 자라 갯일을 했던 나이가 지긋한 어민들은 몸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분해 놓은 시간이 아니라 '생태(체) 시계'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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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에 포구로 들어와 정박 중인 새우잡이배(신안재원도)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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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를 이용한 어법 ⓒ 김준

이 물때는 음력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을 조금으로 한물(마, 무새), 두물(마, 무새), 서물(마, 무새) …열서물(한개끼, 무새), 앉은 조금(대객기) 등으로 구분한다. 물살이 세어지기 시작하는 음력 12일과 27일까지를 '산물'이라고 하는데, 특히 보름(사리)과 그믐(사리)을 전후한 시기를 '사리발'(때)라고 합니다. 사리에는 물이 많이 들고 많이 나기 때문에 그물로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가장 바쁜 물때입니다. 하지만 낚시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물때는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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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주낙을 나가는 어민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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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사리와 반대로 조금때가 있습니다. 사리를 지나 음력 나흘과 열아흐레가 되면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물살이 약해집니다.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을 조금이라고 하는데 물살이 가장 약하고 물이 가장 적습니다.

무안 낙지잡는 마을은 봄가을 해가 질 무렵이면 부부가 낙지를 잡기 위해 채비를 하고 포구로 나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여자들은 머리에 낚시도구를 이고 남자들은 어깨에 메고 나섭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같은 시간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가 갯벌을 열어주는 시간이 매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초저녁에 한숨 자고 12시 무렵에 바다로 나가기도 합니다. 이런 날은 동이 틀 무렵에 포구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달빛이 있고 물이 많지 않고 방방한 때를 '달사리'라고도 하는데 이런 날은 낙지가 제일 많이 잡힙니다. 옛날에는 이런 날이면 횃불을 들고 낙지를 줍기 위해 갯가로 나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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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낙지주낙을 나가는 어민들 ⓒ 김준

갯사람들은 육지 것들처럼 아홉시에 출근 다섯시(여섯시) 퇴근하지 않습니다. 그믐이면 고기잡이 배들은 포구로 돌아와 다음 물때를 기다립니다. 그 사이에 쌀이며, 반찬이며, 소금, 가스 등 고기잡이를 하는 동안에 지낼 것들을 준비합니다. 뱃사람들은 이를 '식구미'라고 합니다. 이런 식구미는 선주들이 준비하고, 나중에 어획량에서 제합니다. 여러 개의 낚시를 연결해 고기를 잡는 '주낙'(낙지주낙, 장어주낙 등)은 물살이 세고 빠른 사리 때에는 조업을 할 수 없지만 그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에게는 사리때가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갯사람들이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늘 변하는 시간에 맞춰 생활을 합니다. 육지처럼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몸으로 다양성과 차이를 느끼며 생활합니다. 그래서 개방적이며, 진취적입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문화가 그렇습니다. 차이를 인정할 줄 아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물길을 막고 육지의 시간을 어민과 갯벌과 바다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바다와 섬 그리고 갯벌을 어민의 눈으로, 바다의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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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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