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청장 거취문제, 공은 국회로?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대통령은 고개를 숙였는데...

등록 2005.12.28 09:24수정 2005.12.2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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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7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농민사망사건과 관련, 대국민사과를 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대통령은 머리를 숙였는데 경찰청장은 뻣뻣이 세웠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 이게 현실이라고 한다.

'고 전용철·홍덕표 농민 살해규탄 범국민대책위'는 허준영 경찰청장의 파면을 요구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럴 법적 권한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했다. 면피성 발언 같지만 꼭 그렇게 볼 수만도 없다. 현행법상 대통령은 임기제 경찰청장을 자의적으로 해임할 수 없다. 해임 권한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유는 직무와 관련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로 한정된다.

"농민 두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사망 원인을 은폐·조작하려 한 경찰의 최고 책임자의 과오가 어떻게 직무와 관련없는 것이냐"는 상식적 반문이 나올 법 하지만 법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이게 법과 상식의 간극이다. '비상식적' 법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도 허준영 청장에게 도의적 책임은 있으나 직접적 책임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허준영 청장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 해임하기는 쉽지 않다. 허준영 청장에게 물을 수 있는 게 '도의적 책임' 뿐이라면 거취의 판단 주체는 허준영 청장 본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 대통령은 "본인이 판단할 문제"라고 했고, '본인'은 사퇴하지 않겠다고 했다.

청와대는 적잖이 답답해하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고개를 숙인 직후 한 핵심 참모는 "(노 대통령의) 회견 내용 가운데 허준영 청장에 대한 '재신임'을 시사하는 언급은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틀 전에 "허준영 청장이 사의를 표명하면 수리할 것"이라는 말을 흘린 청와대다. 물러나라는 간접적인 메시지다. 하지만 허준영 청장은 알아서 기기는커녕 오히려 모르는 척 대들고 있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두 가지다.

궁금증 하나 막 나가는 검사들과 끝장토론하던 노 대통령은 지금...

노 대통령은 정치적 행보까지 포기하며 무기력한 처신을 하는가?

대다수 언론의 진단은 이렇다. "(허준영) 청장 퇴진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가 강한 반발에 부닥치면 최고 권부와 권력의 수단이 정면충돌하는 부담스러운 모양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중앙일보).

그럴까? 그렇다면 2003년의 '검사들과의 대화'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노 대통령은 "이쯤 되면 막 나가는" 검사들을 불러모아놓고 끝장토론을 했다. 물갈이 인사에 반발하는 검사들 앞에서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내 관철시켰던 노 대통령이다.

그 때의 저돌적인 면모는 어디로 갔을까? 그 때와 지금의 차이가 법이 허용한 대통령의 권한 차이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법 테두리를 뛰어넘은 파격 행보를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는 다른 문제다.

검사들과의 대화를 기점으로 '최고 권부'와 '권력의 수단'이 제갈길을 가기 시작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 때의 경험이 너무 아팠던 것일까? 그래서 다른 '권력의 수단'만이라도 껴안으려고 한 것일까?

노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기 하루 전에 소방·교정직 공무원은 제쳐놓고 경찰에게만 승진 특혜를 주는 경찰공무원법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거부권 행사를 포기한 것을 전혀 별개의 사안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궁금증 둘 민중의 지팡이, 국민 인권은 멀고 식구 밥그릇은 가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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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농민사망사건과 관련해 허준영 경찰청장이 27일 대국민사과를 하기 위해 경찰청사 브리핑룸에 들어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또 하나의 궁금증은 허준영 청장의 속내다. 허준영 청장의 '배째라' 행태를 단지 자리보전 차원에서만 바라봐야 할까? 그럴 정도로 그의 양심줄은 경직돼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관해서도 대다수 언론의 분석은 비슷하다. "수사권 조정 및 경찰공무원법 개정 등 현안에서 경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을 토대로 버티는 것이 아니냐"(한겨레)는 분석이다. 경찰 내부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대를 멨다는 얘기다.

막바지에 이른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 그리고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거부로 내년 2월까지 보완 입법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경찰공무원법 개정 문제를 앞에 두고 경찰 총수가 물러나면 경찰의 기가 꺾일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얘기다.

이런 분석이 타당하다면 허준영 청장은 어제의 발언을 철회해야 한다. 허준영 청장은 어제 기자회견장에서 "임기제 청장으로서 맡은 일을 다 하는 게 대통령에 대한 충성이고 국민에 대한 충성"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렇게 수정돼야 한다. "경찰 총수로서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게 부하들에 대한 충성이요 도리다."

이렇게 놓고 보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김종빈 전 검찰총장이다. 김종빈 전 총장은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법무장관에 맞서다가 사표를 던졌다. 결국 불구속 수사 지휘를 수용했으면서도 짐을 쌌다. 수사 지휘권을 수용하면 검찰의 권위가 추락한다는 내부 여론을 넘지 못한 결과다.

검찰총장과 경찰청장의 행태, 현상은 다르지만 동기는 같다. 조직의 논리를 우선하는 '팔 안으로 굽히기' 행태 말이다. 이들에게 국민과 인권은 멀리 있다. 오히려 '우리 식구의 밥그릇'이 더 가까이 있다.

허 청장 거취, 공은 다시 국회로... 정상화만 된다면

공은 다시 국회로 넘어갔다. 허준영 청장의 거취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국회의 '탄핵' 뿐이다.

현행 법은 경찰청장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을 때 국회의 탄핵대상이 된다고 명시해놓고 있다. 국가인권위와 대통령의 말처럼 허준영 청장에게 '직접적 책임' 즉 '법률적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이 "문책 권한이 없다"는 대통령의 입장을 강하게 성토까지 했으니 검토 필요성은 더더욱 크다.

아울러 '국민 인권 신장'이란 대명제 아래 논의돼 온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를 되짚어야 한다.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를 검토하기 이전에 수사권 조정과 인권 신장의 상관성을 재점검해서 부족한 게 있다면 보완해야 한다.

국회가 할 일은 이처럼 많다. 정상화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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