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두 주인공

[중-일, 패권경쟁 달아오른다 9] 야스쿠니 참배, 왜 문제가 되는가? 5편

등록 2006.01.02 10:46수정 2006.01.0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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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의 제8회 기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 패망 직후의 미군 점령 하에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점차 추락과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가 전후(戰後)에 일본 군국주의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야스쿠니신사의 운명에 반전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 바로 '국공내전'과 '미국의 동북아전략의 수정'이었다. 중국을 대소(對蘇) 전진기지로 삼으려던 당초의 전략이 국공내전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자, 미국은 중국의 '대타'로 일본을 자국의 동북아 전초기지로 삼게 된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동북아정책으로 문서화된 때가, 제8회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1948년 10월 7일이었다. 이날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가 '미국의 대일정책에 대한 권고'라는 문서를 채택함으로써, 일본을 패전국이 아닌 동맹국으로 '대우' 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대일정책 수정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수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수정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새로운 대일정책에 대해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함과 함께 전범국가 일본에 일종의 '면죄부'를 준 것이 바로 오늘 살펴보게 될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다. 반(反)역사적인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로 인해 일본 군국주의가 면죄부를 받았고, 이와 함께 야스쿠니신사 역시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가 반역사적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 회의가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거역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사회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 중의 하나는 일본 군국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는 일본 군국주의를 청산하기는커녕 도리어 그에 대해 힘을 실어주는 반역사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의 반역사성을 크게 2가지 측면에 국한시켜 살펴보기로 한다. 한 가지는 강화회의의 실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일본 군국주의 청산과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들이 왜 이 회의에 참석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첫째,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의 실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강화회의의 실제 목적은 패전국 일본을 응징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예방하는 것이었어야 한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와 관련하여 미국이 취한 일련의 행위를 보면 이 강화회의의 반역사성이 선명해진다.


한국전쟁 발발을 기화로 미국정부가 1950년 9월에 작성한 '대일강화 7원칙'에는 (1)일본을 친미적 국가로 육성한다 (2)일본에 강력한 경찰군을 창설한다 (3)강화조약 이후 일본을 통제할 기구를 만들지 않는다 (4)일본에 대해 경제적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등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이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목적은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아시아와 세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을 친미적인 국가로 만드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일본을 비무장화시키기보다는 경찰군이라는 명목 하에 일본을 재무장시키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배상책임을 덮어 주는 대일강화 7원칙에 대해 미얀마·인도네시아 등이 반발하자, 미 국무부 덜레스 고문은 노동력 제공 방식의 피해배상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일본 노동자들이 동남아에 가서 노동을 함으로써 일제의 죄값을 치르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국이 일본 군국주의를 비호하는 사이에, 1950년 8월 10일에는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를 창설하는 법령이 공포되었고, 1951년 8월에는 침략전쟁에 가담하였던 일본군 장교들이 간부로 복귀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전범인 동시에 패전국인 일본을 상대방으로 하여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 1951년 9월 8일 그날, 미국과 일본은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별도로 체결하였다. 미국은 이날 오전에는 '전범인 동시에 패전국'인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날 오후에는 '동맹국' 일본과 안보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오늘날 동북아가 처한 모순의 한 가지 원인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가 반역사적인 첫 번째 이유는, 패전국 일본에 면죄부를 '발행' 하고 일본을 미국의 동맹국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범죄자에게 형벌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범죄자의 신분을 '경찰 보조원'으로 변경시켰기 때문이다.

둘째, 일본 군국주의 청산과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들이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석하였는가 하는 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본 군국주의와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그로부터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또한 그에 대항하여 싸웠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 청산에 가장 적극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은 일본 군국주의로 인해 최대의 피해를 입었고 또한 일본과 가장 격렬하게 싸웠으며 일본군 100만 대군의 발을 묶어 둠으로써 일제를 패전의 늪으로 몰아넣은 명실상부한 '전승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일본 군국주의를 철저하게 청산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을 가진 나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은 강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다.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물론 대만의 중화민국도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

미국은 강화회의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위하여 두 나라와 접촉하였다. 미국의 덜레스 국무부 고문은 일본의 요시다 총리와 만나 '일본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강화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1951년 6월에는 모리슨 영국 외무장관과 회동하여 중국을 강화회의에서 배제하기로 하는 데에 합의를 이루었다.

미국이 중국을 배제한 이유는 간단하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 군대가 승리함에 따라 미국이 중국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없음이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초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작은 섬 대만을 초청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대륙도 대만도 모두 초청을 받지 못했다.

중국과 유사한 입장에 있었던 한민족 역시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 한민족도 중국 못지않게 식민지 피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주 등지에서 항일독립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전승국의 지위를 갖는 것이 마땅했다.

미 국무부의 덜레스도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50년 6월 6일에 한국을 강화예비회담에 초대하기로 하는 안(案)을 작성한 바 있다. 그리고 1951년 4월에는 요시다 일본 총리에게도 이러한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덜레스의 구상은 일본측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요시다 총리의 주장은, 한국이 연합국 지위를 얻으면 결과적으로 일본 국내에 사회적 혼란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강화조약에 말없이 나와야 할 패전국 일본이 강화조약 참가국 선정에까지 관여하였던 것이다. 누가 패전국이고 누가 승전국인지를 모호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렇게 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는 꼭 참가해야 할 두 나라가 배제당하고 도리어 패전국 일본이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에 체결되었다. 강화회의는 패전국 일본을 응징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예방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일본을 재무장시켜 일본을 미국의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한 모임이 되고 말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본 군국주의에 면죄부를 준 강화회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기에 한민족과 중국이 전후 국제질서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원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이 시기에 한민족과 중국을 자국의 위성국가로 만들려고 했지만, 한민족과 중국 내부에서는 미국의 패권을 거부하는 흐름이 강했다. 미국의 패권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한민족 및 중국의 영역에서는 전쟁이 재발하였고, 양쪽 모두 전쟁의 여파로 미국과 일본의 결탁을 제지할 겨를이 없었다.

위와 같이 한민족과 중국을 배제한 가운데에 열린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는 일본을 '사면' 하고 일본을 미국의 동맹국으로 만드는 반역사적인 회의였고 또 동북아의 건전한 진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강화회의를 통해 일본 군국주의는 사형 선고가 아닌 '면죄부'를 받았고,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도 '덕분에' 몰락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일제 패망 직후만 해도 신사(神社) 중에서도 야스쿠니신사를 특히 탄압하던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야스쿠니신사는 물론 일반 신사에 대해서도 통제를 풀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야스쿠니신사도 경내 부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국가 공무원이 다시 신사 참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0월에는 일본 국왕(소위 '천황') 부부가 '대담하게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였다. 일본 군국주의의 인적(人的) 상징인 일본 국왕과 물적(物的) 상징인 야스쿠니신사가 미국의 비호 하에 감격적인 '재회'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일본유족 후생연맹'은 국가가 야스쿠니신사의 위령제 비용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없이 고개를 숙이던 패전 직전 일본인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자신들이 미국의 동맹국으로 격상되었다는 점에 기인한 일본인들의 강한 자신감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제8회 및 이번 기사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는 국공내전을 계기로 부활의 기회를 찾고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를 계기로 면죄부를 받게 되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근본 원인이 단순히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야스쿠니신사가 일제 패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비호 덕분이었다.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본질은 미국 패권주의와 일본 군국주의의 결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문제 삼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견제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견제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중국이 대일(對日) 공세에서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야스쿠니신사가 동북아의 현존 모순을 전형적으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미국 비판의 효과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북한과 달리, 중국은 일본에 맞서는 방법으로 미국 견제의 효과도 부수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 등은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서 한 가지 자충수를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비판의 초점을 'A급 전범 안치'에 국한시키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리어 일본에게 '비상구'를 제공하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그 점에 관하여는 제10회 기사에서 계속 논의하기로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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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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