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용기 없었다, 그러나 지지한다

마음이 부자인 어느 이주노동자와 심보 가난한 어느 기업 이야기

등록 2006.01.06 18:15수정 2006.01.0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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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친구들이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노동부에 우리 몫까지 대신 신고해 주세요. 우리 네 사람은 내일 떠나지만, 가니(Gani)와 이르완(Irwan)은 한국에서 계속 일한다고 하니까, 퇴직금도 받고 밀린 월급도 받았으면 좋겠어요."


노동부에 진정을 제기해 달라고 하며, 누르딘(Nurudin)이 내민 것은 자신과 같이 온 친구인 수꼬(Suko)의 2년 8개월간의 급여명세서와 다른 세 명이 보관해 왔던 급여명세서 뭉치였다. 급여명세서를 내민 누르딘과 친구들은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해서 삼 년을 일했는데, 최저임금에 따른 급여를 받지 못했고 국민연금 가입도 해 주지 않아 손해가 크다고 했다.

a 급여명세서

급여명세서 ⓒ 고기복

인도네시아 공동체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오르간과 밴드를 맡은 누르딘과 친구들을 위해 일요일 잔업 시간을 조정해 달라는 협조문을 보내야 했던 로*제과는 같은 용인 관내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 굴지의 초콜릿 제조회사다. 하지만 최저임금도 지키지 않고 국민연금 가입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출국 일 주일을 앞두고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았던 누르딘은 힘이 없는지 함께 온 친구들을 대표해 나긋나긋하게 말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로*제과에서 여덟 명이 같이 왔을 때, 네 사람만 퇴직금하고 월급 문제로 노동부에 진정했잖아요? 네 명은 출국할 생각을 갖고 있고, 네 명은 출국할 생각이 없어서 그랬던 거였거든요. 그런데 벌써 그 중에 두 명은 출입국 단속에 걸려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회사에서 쉽게 돈을 줄 것 같지 않아서요."

"노동부에서 12일까지 지급하라고 했으니까 기다려 보면 알겠지요. 로*제과가 크고 유명한 회사니까 임금 문제는 쉽게 정리할 거예요. 그런데 왜 이제야 이런 얘기를 해요?"


"노동부에서 지급하라고 했지만, 부장님이 이것 떼고 저것 떼고 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다 틀린 거예요. 우린 그동안 일요일도 얼마나 많이 일했는데, 최저임금도 틀렸고, 국민연금도 없었어요. 회사에서 이것저것 떼면 최저임금 틀린 것하고 국민연금 안든 거 하고 해서 친구들이 돈을 받았으면 해서요."

"그럼 진정해 달라고 하는 건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네요?"


"저는 가니하고 이르완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한 만큼 받지 못한 것을 달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어요. 반면 저희는 용기가 없었어요. 퇴직금을 달라고 하고, 임금 계산을 제대로 해 달라고 하면 사장님이 화내고, '인도네시아 가!'라고 할 것 같았어요. 지금은 비행기 표도 샀고 내일이면 떠날 입장이니까, 우리가 가니와 친구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누르딘과 친구들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이런 것이었다.

'가니와 친구들이 퇴직금과 임금문제로 노동부 진정을 했는데, 그 외의 문제가 더 있다. 자신들은 산업연수생으로 삼년 동안 일하면서 최저임금도 틀리게 받았고, 회사에서 국민연금을 가입하지 않아서 받은 손해가 크지만 용기가 없어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니와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용기를 보여줬다. 비록 나는 용기가 없지만, 가니와 친구들의 행동에 지지를 보낸다는 것이다.'

가니와 누르딘은 삼 년을 같은 회사, 같은 기숙사에서 어떻게 일을 하며 살았나 싶을 정도로 성격이 달랐다. 가니는 활달하고 장난기가 많으면서 자기 주장이 강했다. 반면 누르딘은 인도네시아 공동체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오르간을 책임질 만큼 음악적 재능이 있으면서도 말수가 적어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덟 명이 함께 일하던 그들은 우리 쉼터에 올 때 같이 올 때도 있었지만, 두 패로 나뉘어 다닐 때가 많았다.

그렇게 성격이 달랐던 그들은 삼년 계약을 마치고 돌아갈 시기가 되었을 때 귀국에 대한 입장이 달라 결국 헤어졌다. 하지만 누르딘과 친구들이 출국하기 전날, 가니와 친구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떠나겠다고 하면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처음부터 여덟 명이 한 목소리를 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떠나는 입장에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남아 있는 이들을 배려하는 누르딘과 친구들의 마음 씀씀이가 외국인이주노동자의 임금을 갖고 장난치는 거대기업의 쫀쫀함과 비교가 되었다.

가난하지만 부자같은 마음 씀씀이의 이주노동자에 비해 부자지만 심보가 가난한 유명기업의 행태가 씁쓸함을 더하게 하는 정초다.

덧붙이는 글 | 누르딘과 친구들은 지난 1월 3일 출국했고, 가니와 친구들은 아직까지 퇴직금과 임금을 정산 받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누르딘과 친구들은 지난 1월 3일 출국했고, 가니와 친구들은 아직까지 퇴직금과 임금을 정산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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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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