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이-- 징한놈의 OO"

[바다에서 부치는 편지 9] 비금도, 시금치 밭에서 만난 할머니

등록 2006.01.17 19:26수정 2006.01.1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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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이-- 징한놈의 OO."


너무 멀어서일까, 아니면 할머니가 뱉은 뒷말을 내가 듣지 못했을까, 아마도 할머니가 낯선 사람이 다가오는 걸 보고 삼킨 모양입니다. 얼굴이 부었다고 하지만 처녀 적에는 고운 얼굴이었을 것 같습니다. 덩그러니 있는 큰 집은 할머니와 작은 강아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1000여 평의 논과 700여 평의 밭에 시금치를 심어 생활하고 계십니다.

김준
김준
작년에는 살아생전 그렇게 속을 썩이던 영감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예순이 넘도록 할머니를 귀찮게 하던 할아버지는 생의 끈을 놓기 직전에도 3년 동안 심부전증으로 병원신세를 지면서 할머니를 귀찮게 했다고 합니다. 시금치 농사만 30여 년을 넘게 짓고 있는 할머니, 돈 좀 모아두면 할아버지가 가져다 쓰셨다고 합니다.

"영감은 작년 7월 달에 죽었어라. 워--매, 워-매 내 고상을 얼마나 하고. 심부전증이라. 폐암 걸려서. 돈은 돈대로 들고 고상은 고상대로 하고. 막 웁디다.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그런 것 상상하면 일하기도 싫어."

할머니는 시금치를 캐던 바구니를 옆에 두고 옆 논두렁에 저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생전에 다정한 이야기 한번 안 했을 영감님. 이런 것을 미운정 고운정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할머니가 시금치 농사를 짓는 논은 과거에는 갯벌이었습니다. 옆에 바위에 앉아 운저리를 낚았다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 보아 오래되어야 40여년 정도 될 듯싶습니다. 시금치는 논 보다는 밭에서 자란 것이 좋다고 합니다. 특히 비나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논에 심은 시금치는 제값을 받기 어렵습니다. 잘 자라다가도 잦은 눈비를 맞게 되면 죽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보이시지 않으려는 듯 앞을 보고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이럴 때는 미운 생각을 하는 것이 약입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도 좋은 구석은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평생을 살아온 영감이 아무리 미운 짓만 했다고 애틋함이 없겠습니까?


"될 수 있으면 젊어서부터 좋게 하고 살아. 우리 영감은 그나제나 나를 뚜들어었어. 이런 것 해서 돈 좀 벌어놓으면 쓰면서, 그나제나 60 넘어서도 맞았단게. 그러다 병든 게 내 고상시키고."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할머니 겨우내 이렇게 해서 얼마나 버세요."

일흔이 넘으신 할머니 총기가 아주 좋으십니다. 작년에 600만원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가격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로 보아 1000만원 벌이도 하는 것 같습니다. 시금치 작업으로 할머니가 일어나는 시간은 새벽 4시 무렵, 비닐하우스로 만든 작업장에 불을 밝히고 전날 따 놓은 시금치를 다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작업을 해야 아침배로 시금치를 보낼 수 있습니다. 농협에서 마련한 트럭과 배를 이용해 할머니가 딴 시금치를 비롯해 비금도 시금치는 서울로 부산으로 전국의 농산물 시장으로 팔려나갑니다. 비금도 시금치는 '섬초'라고 농산물 시장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브랜드입니다.

김준
김준
날이 새면 할머니는 아침을 먹고 다듬어 놓은 시금치를 깨끗이 씻어서 물이 빠지도록 바구니에 담아두고 시금치 밭으로 나갑니다. 시금치 작업 중 할머니의 가장 큰 걱정은 추위도 아니고, 시금치 값도, 아픈 허리도 아닙니다. 밭에 따둔 시금치를 작업장까지 운반하는 일입니다. 밭에서 특수 제작한 작은 낫으로 시금치를 따서 노란 바구니에 담아 논두렁까지 가져오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합니다. 다시 외발리어카에 싣고 작업장으로 옮겨 놓고 다듬고, 세척해서 갈무리를 해 두었다가 15kg의 상자에 넣어서 보내야 합니다. 논두렁에 카메라를 두고 나섰습니다. 겨우 두 바구니에 불과하지만 할머니에게는 그것도 큰 짐인 모양입니다.

"갔다주면 좋겄오. 들어오지 말쇼. 질어, 여그는 못 들어와. 하도 빠져싼께."

김준
할머니는 신발에 흙이 묻는다고 논두렁에 기다려라 하지만 시금치가 나지 않는 곳을 밟고 조심스럽게 들어가 들고 나왔습니다. 매일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특수 제작한 신발을 싣고 계십니다. 신발을 비닐로 싸고, 다시 겉을 모기장으로 치장을 했습니다.

"흙이 하나도 안 묻어. 하도 댕겨싸도 흙이 안 묻어. 논도 안 이겨지고, 비니루 싣고 싣어."

할머니는 섬에서 태어나 섬에 사는 스무 살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3년 동안 배를 짰고, 그 뒤 겨울철에는 시금치 밭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요즘 할머니의 시금치 작업량은 11월에 시작해서 3월까지 400박스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혼자서 하시는 것이지요. 겨울바람에 맞서 번 돈, 봄이면 허리가 아프고 건강이 안 좋아 병원에 가져다주는 것이 일이라고 합니다. 미안했던지 할머니는 검정 비닐봉지에 가득 시금치를 담아 줍니다. 할머니의 투박한 손에서 섬 사람과 여성 그리고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징한 놈의 시금치인지, 징한 놈의 세상인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는 날이 새기 전 새벽에 일어나 시금치 작업을 시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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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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