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의 질긴 인연을 놓고 조상신이 되다

도초도 초분이야기

등록 2006.01.10 10:07수정 2006.01.1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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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가 내려다보이는 용달산 양지바른 언덕에 이엉과 용마름을 예쁘게 엮어 새 옷으로 단장하고 누워서 누구를 기다릴까. 발아래 바다는 아침 해를 받아 불꽃놀이를 하듯 물비늘이 반짝인다. 경사가 제법 심한 산비탈을 일구어 만든 밭에서 노부부가 두꺼운 옷에 수건으로 얼굴을 칭칭 감고 아침 칼바람을 막으며 시금치 작업을 하고 있다. 인근 비금도처럼 이곳도 겨울이면 시금치 농사로 아침을 맞고 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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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유언에 따라 할멈 자리에 초분을 한 '황씨초분' ⓒ 김준

비금도 송치마을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이 도초도 '불섬'(화도)이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비금도와 자은도를 오가는 일이 이웃집 대문 드나들기보다 쉬운 일이지만 옛날에는 혼사가 있거나 문상이라고 갈 일이 생겨야 배로 건넜다. 비금도로 시집온 큰 애기들이 대부분 도초도 처녀들인 때도 있었다.

화장실과 사돈댁은 멀어야 된다지만 뱃길이 열려야 중매쟁이도 오가고 혼사도 넣을 수 있어야 섬간 결혼이 가능했다. 지금이야 모두 뭍으로 나가서 눈이 맞아 결혼을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섬 총각들이 뭍의 색시를 데려오는 일은 쉽지 않다. 농촌총각들도 결혼이 어려워 외국으로 나가고 있는 판인데. 도초도와 비금도는 서로 처녀 총각이 오갔던 '통혼권'으로 매우 긴밀한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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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초도 불섬(화도)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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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분과 장승이 있는 도초도 고란리 전경 ⓒ 김준

'할멈, 기다려. 내 곧 가리다'

황씨가 이곳에 눕기 전 그 자리에는 부인의 자리였다. 금술이 좋아 조상신도 시기와 질투를 했던지 남편을 두고 부인이 먼저 갔다. 황씨는 부인과 인연을 끊고 선영으로 보내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이곳 양지바른 곳에 초분을 했다. 그리고 부인을 선산에 묻고, 자신도 마지막 숨을 넘기며 자식들에게 할멈 초분을 했던 자리에 머물게 해달라고 유언을 했다.

그곳에 자신의 자리도 마련했건만 굳이 부인이 거쳐 간 자리에 초분을 만들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까닭은 무엇일까? 이승에 다하지 못한 사랑을 찾아 부인의 뒤를 따르기 위한 저승의 미로를 찾아가는 것일까.

초분까지 안내해 준 사람은 두 망자와 친척 되는 마을에 고석만(67·신안문화원 이사·고란리 거주)씨였다. 그는 생전에 두 분은 금실이 좋기 마을에 소문날 정도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일까. 이엉과 용마름 사이로 할아버지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할멈, 조금만 기다려, 내 곧 가리다.'

고래로 우리나라에서 모시는 신중에서 으뜸은 조상신이다. 언제 어느 때고 쉽게 찾고, 부르는 신이다. 조상신의 반열에 도달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 중의 하나가 육신을 버리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초분은 망자들이 육신을 버리고 조상신의 반열에 이르기 위한 통과의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풀을 덮어쓰고 이승에 모든 업들을 썩어가는 육신과 함께 버리고 선영으로 가기 위한 수행의 과정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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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곳에서 본 황씨 초분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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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황씨초분 ⓒ 김준

초분은 1957년 <한국서해조사>에 의해 알려진 상중 의례의 하나로 '예빈', '빈소', '빈수', '초변', '출분', '채빈', '초빈', '채변', '촐빈', '출분이', '출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학계에서는 '초분'으로 통용되고 있다.

도초도 고란리에는 황씨의 초분 말고도 바로 인근 양지바른 곳에 1기의 초분과 섬 내 가장 높은 금정산에 1기가 모셔져 있다. 특히 금정산과 매바위 인근의 골짜기에는 30여 년 전만 해도 초분들이 가득해서 초분골이라고 불렀다. 초분골 아래에는 당산나무가 있고, 나박포(소재지)에서 들어오는 고산리 나들목 삼거리에는 석장승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승의 질긴 끈을 놓고 '조상신'이 되다

초분은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은 채 돌이나 통나무 위에 관을 얹어놓고 탈육 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 등으로 덮은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을 말한다. 초분은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남의 경우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고, 새마을운동 전까지는 서남해의 도서 지역에는 다수 남아 있었다. 이러한 초분은 일제강점기 위생법 제정으로 화장이 권고되고, 1970년대 생활개선 및 미신타파 등 새마을사업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최근 도초도, 비금도, 송이도, 낙월도, 계화도, 무녀도 등에서 필자가 직접 초분을 확인했다. 특히 송이도와 도초도는 2000년 들어서도 초분을 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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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송장으로 선산에 갈 수 없어 초분을 한 김씨. ⓒ 김준

초분을 쓰고 나서 탈육이 되고 난 후 좋은 날을 택해 이장을 하는데, 한식날이나 윤달이 든 달에 많이 한다. 가족의 개별적인 사정으로 이장이 어려울 경우 초분 상태로 이엉만 매년 교체하고는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

초분을 하는 이유도 갖가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발행한 <초분>(2003)에는 그 이유를 사자의 운과 산운이 맞지 않거나, 풍수적인 이유로 묘를 쓸 수 없는 운이 유가족 중에 있을 때(집안 며느리 임신 등), 정월이나 2월 달에 돌아가셨을 때 땅을 건드리면 토지신이나 영등신이 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송장으로 선산에 갈 수 없을 때 초분을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적당한 장지를 정하지 못했을 때, 집안에 좋지 않는 일이 자주 생길 때, 사망 당시 후손들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일손이 없거나 먼 곳으로 가기 위해 임시로 가장을 할 때, 전염병이 퍼질 때, 초분이 자손에게 좋거나 효도를 다하는 것으로 믿는 전통 때문 등이다.

도초도의 또 다른 초분을 한 김씨는 진송장(산송장)을 조상 곁으로 모실 수 없다는 자손들의 믿음에 의해 초분을 해 모셨다. 2000년도에 송이도를 방문했을 때 10여기의 초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정월달에 땅을 건드릴 수 없어서 초분을 했다. 정월이나 2월에 땅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어민들의 생업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때는 바람도 많고 해류도 바뀌는 계절인 탓에 어민들은 영등신이 내려와 미역씨도 뿌리고, 전복씨도 뿌리며 생업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이다. 이 시기 부정한 일을 하게 되면 일 년 바다 농사를 망치게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사나운 바다에서 생업활동을 해야 하는 어민들에게 행여 좋지 않는 일이 생길 경우 영등신을 노하게 해서 생긴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자손들에게 좋지 않는 일이 생길 경우 초분을 하는 사례도 있다. 임자도에서는 매우 특이한 사례로 자식들에게 좋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한국전쟁 기에 물에 빠져 죽은 조상의 넋을 건져 씻김굿을 하고 초분을 한 사례도 있다.

초분은 탈육이 되어 본장 또는 영장을 할 때까지 시신을 모셔두는 곳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탈골이 잘 될 수 있도록 마을에서 떨어진 양지바른 곳에 모시는 경우가 많다. 땅에 묻지 않고 아래에 돌을 깔고('덕대'라고 함) 그 위에 관을 놓고 짚으로 이엉과 용마름을 덮는다. 초분의 형태는 관의 길이 같이 길쭉한 모양을 하지만 영광 송이도에서 확인된 것처럼, 뼈를 추려서 본장을 하지 않고 정방형의 나무상자에 넣어 원뿔형태의 초분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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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리 당산나무, 이곳 인근에 신당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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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돌담이 정겨운 고란리. ⓒ 김준

장승 그리고 돌담

마을 입구 장승과 마주보는 멀지 않는 곳에 도초도 전체를 아우르는 '신당'(神堂)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신당에서는 면민들이 모여 매년 정월 보름에 국태민안과 면민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작은 신당이지만 위엄이 있어 앞을 지날 때 웃을 벗고 가거나, 소변을 눈다면 화를 면키 어려웠다. 심한 경우에는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어려운 경우도 발생했다.

이를 걱정하던 차에 지나던 고승에게 도움을 청하자 '장승'을 세우면 화를 면할 것이라 하여 장승을 세워 전하고 있다. 당시 목장승이었지만 1938년 석장승으로 바꾸었다. 이와 관련해서도 주민들은 저녁이면 초분골에서 귀신들이 내려와 목장승을 가지고 놀기 때문에 무거운 석장승으로 교체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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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리 석장승 ⓒ 김준

몇 해 전까지 남아 있던 초가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아직도 골목에 흙돌담은 잘 남아 있다. 30여 년 전까지 해도 고산리는 많은 초분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5년 전까지 '숭어'(상여)를 메고 초상을 치렀지만 지금은 상여 멜 사람이 없어 트럭에 싣고 상주와 상두꾼들이 뒤를 따른다.

예로부터 마을마다 상두계가 있어 죽음의례를 서로 품앗이 했다. 그러나 농어촌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로 상두계 유지가 어려워지고 대신에 상품화된 현대식 장례문화나 종교식 의례가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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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승 ⓒ 김준

고란리의 경우 이러한 전통이 사라지면서 '달애'(밤달애)도 사라졌다. 밤달애는 진도의 '다시래기'처럼 망자의 집에서 상두꾼과 마을 주민들이 어울려서 흥겨운 노래가락을 하면서 한바탕 노는 서남해안의 죽음의례의 하나이다.

지금은 마을 앞이 논으로 변해 시금치가 심어져 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장승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마을 앞에서 시작된 작은 '원'은 점점 밖으로 나가기 시작해 불섬과 연결하는 거대한 제방이 축조되었다. 도초도의 중심이 '나박포'이지만 제방축조와 염전조성이 있기 전까지는 고란리가 도초도의 중심이었다.

이곳 당산제가 있는 날이면 도초도 사람들이 전부 구경 올 정도로 볼 만했다. 아쉽게도 전승자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향토학자들이나 민속 연구자들이 재현 노력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초분이 남아 있고, 장승이 있고, 돌담 뿐 아니라 불과 몇 해 전까지 초가도 남아 있어 욕심을 많이 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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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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