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적의 맞은편에 놓여져 마시지 않은 채 있는 찻잔을 가리켰다.
“세 분이 앉아 있다가 한 분이 자리를 뜨고 난 후 다시 새 잔에다 차를 따라 마신 걸까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그럴 리 없죠. 더구나 모용가주는 맞은편에 앉아있었을 것이고 당대협이 좌측에 앉아 있었을 거예요.”
대체로 자리에 앉는 것도 관례가 있는 법이다. 주인과 친근한 사람이고 주인이 대접을 해야 할 사람은 주인의 양 옆에 앉는다. 하지만 주인 보다 배분이 높은 인물이고 모셔할 사람이라면 맞은편에 앉는 경우가 많고 무림의 관례대로 정해진 서열에 따라 나머지 사람이 옆 좌석에 앉게 되는 것이다. 모용가주와 당일기를 비교하면 아무래도 상석은 나이로 보나 무림에 차지하는 위치로 보나 모용가주가 앉는 것이 당연했다.
“모용가주가 나갔다 하더라도 당대협은 자리를 옮기지는 않았을 거예요. 밤에 있을 수리 사냥에 대해 상의했을 터이니 가깝게 앉는 것이 훨씬 나았을 테니까요.”
“그럼 다른 사람이 왔었다는 말이오?”
구양휘가 물으며 몽화에게 턱을 두세 번 옆으로 돌리며 눈짓을 했다. 그것은 밖에 누가 와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알아챈 몽화가 웃으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당대협이 아니라면 바로….”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헛기침과 함께 당일기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하다 만 말은 ‘바로 흉수일 테니까요’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당일기를 보고 말을 돌렸다.
“다행이군요. 흉수가 아니라서….”
갈인규가 아무 말 없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당일기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떡이더니 몽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귀가 간지러워 그냥 있을 수 없었소. 설사 노부가 흉수로 몰린다 해도 와보고 싶었소.”
이미 단세적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마침 잘 오셨어요. 당대협.”
“강북에 신비로운 꽃 한 송이가 있다고 하더니 기지가 탁월한 소저로구려.”
이미 몽화임을 짐작했다는 의미였다.
“자… 하던 말을 계속하기로 하죠. 탁자 위에 있는 찻잔은 분명 새로운 손님이 온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새 손님이 오자 모용가주와 당대협이 마셨던 찻잔을 옆으로 치워놓고 새 잔으로 대접했다는 것이죠. 당대협이 나가신 뒤에 분명 누군가 왔어요. 그는 잔에 봉미독이 발라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에 입도 대지 않았어요. 바로 그가 흉수예요.”
“그가 누구요?”
당일기가 묻자 몽화는 살며시 웃더니 오히려 물었다.
“당대협께서는 찻물에 분명 봉미독이 있음을 아셨을 거예요. 헌데 왜 그냥 마셨던 것이죠? 봉미독이 있음을 단문주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건가요?”
“물론 알았소. 하지만 아주 미세한 양이었고 노부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소. 더구나 단문주가 천궁시에 암기를 매달 때 묻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던 것이오.”
“좋아요. 여하튼 저는 당대협이 흉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약 하독하려면 네 개의 찻잔에 모두 독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더구나 의심받게 모용가주의 찻잔에도 하독할 이유도 전혀 없었을 것이고요.”
“그렇소.”
“네 개의 찻잔에는 모두 독이 들어있었어요. 하지만 다기에는 봉미독이 들어있지 않았고 당연히 물을 끓이는 저기 주담자에도 독은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유독 네 개의 찻잔에만 독이 들어있었을까요?”
그러자 갈인규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네 개의 빈 찻잔에 봉미독을 발라 놓았던 것이오.”
몽화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요. 바로 그것이죠. 이 네 개의 찻잔은 모양이 모두 똑같아서 흉수는 어느 것을 단문주가 사용할지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찻잔을 내오기 전에 이미 찻잔 모두에 봉미독을 발라 놓았던 거예요.”
“어떻게?”
“흉수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예요. 모용가주가 나가고, 당대협이 나간 뒤에 분명 흉수가 왔죠. 그것을 알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인데….”
몽화는 말끝을 흐리면서 의식적으로 목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목득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목득은 몽화의 말에 무언가 느꼈는지 빠르게 옆으로 비껴나가고 있었다.
허나 갈인규는 이미 그런 목득의 행동을 예상했는지 도망가려는 목득의 전면을 막아서며 그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목득은 갑작스러운 갈인규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바로 웅혼한 진력이 느껴지는 주먹을 휘둘렀다.
퍼펑---!
그 역시 권이라면 자신이 있는 터. 주먹과 주먹이 부닥치자 가죽 북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목득의 몸이 한쪽으로 빠르게 날라 갔다. 허나 그것은 갈인규의 권에 당해 날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주먹과 주먹이 부닥치는 반탄력을 이용해 천막을 빠져 나가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안에 있는 구양휘의 형제들은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보다 먼저 광도의 거구가 빛살처럼 움직이며 목득의 완맥을 잡음과 동시에 팔꿈치로 목득의 턱을 가격했다. 몸집과는 달리 너무나 깨끗한 한 수였다.
“크윽--!”
턱뼈가 부러졌는지 벌려진 입에서 선혈과 함께 허연 조각이 허공을 날았다. 몽화는 교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제 진정한 흉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저 자 뿐이죠. 누가 맨 나중에 들어왔는지 말이에요. 물론 저 자가 실토하지 않아도 곧 밝혀낼 수 있을 거예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말이죠.”
몽화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치 비수처럼 목득의 고막을 파내고 있었다. 목득은 절망감을 느끼며 부러진 턱뼈 사이로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그것은 짐승이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 나는… 아… 니….”
당일기가 목득을 한 차례 노려보다가 몽화에게 물었다.
“저 자가 흉수라는 사실은 어떻게 안 것이오?”
“이곳은 군웅들이 밀집되어 있어 왕래가 쉬운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이기 어려운 점도 있어요. 더구나 단문주를 찾아 온 인물이라면 저 자가 모를 리 없죠. 하지만 저 자는 당대협이 나간 뒤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물론 흉수가 그림자처럼 단문주의 거처에 스며들었다면 모를 수도 있겠죠. 허나 그렇다면 단문주가 아무리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사람이라고 해도 조심하지 않았을까요?”
조심했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당할 리가 없을 것이다. 최소한 공력을 운기했을 것이고 미약하지만 독에 중독된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흉수는 분명 단세적의 맞은편에 앉기까지 했고, 들어오자마자 손을 쓴 것이 아니었다. 단세적으로서는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정상적으로 방문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이었다.
“더구나 단문주의 죽음은 만박거사가 사람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보고가 되었어요. 저 자는 시간을 충분히 벌기 위해 이미 단문주의 죽음을 알았음에도 보고하지 않은 것이죠.”
또한 최소한 두 사람 간의 목소리라도 흘러나왔을 것이다. 그것을 목득이 모를 리 없다.
“은밀하게 살해된 경우 대개 십중팔구는 피살자와 아주 가까운 사람의 짓이죠. 더구나 저 자는 봉미독을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느냐는 내 질문에 모른다고 애매하게 대답했어요. 그저 이 사건과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발뺌하려는 생각뿐으로 스스로도 자신이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지요.”
“저 자는 방조자일 뿐 직접 손을 쓴 흉수는 아니오. 하지만 노부는 저 자가 반드시 입을 열어 흉수가 누구인지 토해내게 만들 방도가 있소.”
당일기가 힐끗 목득을 보며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노부는 아주 특이한 독을 가지고 있소. 그것은 목숨을 빼앗지는 않소. 하지만 그 독을 아는 사람은 차라리 치명적인 독은 먹어도 그것은 절대 먹으려 하지 않소. 전신 혈맥에 개미가 기어 다니며 물어뜯는 고통을 어찌 인간으로서 참을 수 있겠소? 더구나 그러한 고통은 매 일각마다 쉬었다가 다시 반복되기 때문에 계속되는 고통보다 훨씬 더 지독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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