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플 엄단' 조치, 씨가 먹힐까?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정치권 '악성 공방' 지속되는 한...

등록 2006.01.26 10:43수정 2006.01.2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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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노무현 대통령은 25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25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내용 가운데 언론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게 있다. 폭력과의 전쟁이다. 노 대통령은 엄단 대상으로 4대 폭력을 지목하면서 이 가운데 하나로 사이버 폭력을 들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설 만도 하다. 임수경씨의 사례는 사이버 폭력 엄단 방침의 정당성을 강화하기에 충분하다.

검찰의 수사결과는 충격적이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 임수경'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악플' 작성자 25명을 소환조사한 검찰도 놀랐다고 한다. 25명 중 서너 명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불혹을 넘긴 중년이었고, 대학교수와 금융기관 중견간부, 전직 공무원 등도 있었다고 한다.

머리가 띵해진다. '악플'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중년의 점잖은 아버지들'이, 다른 대상도 아니고 자식 잃은 어머니의 가슴을 후벼 판 사실을 누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익명의 공간이 그늘 수준을 넘어 밤 뒷골목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의 방증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노 대통령의 사이버 폭력 엄단 방침을 정당화하는 뉴스가 또 있다.

'네이버'가 실상을 공개했다. 일일 뉴스게시판 이용자의 0.06%에 불과한 사람들이 하루 20건 이상의 댓글을 쏟아내 전체 댓글의 25%를 생산한다고 한다.

이는 인터넷 여론시장을 극소수의 '꾼'들이 점령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 이른바 '꾼'들이 악플 생산의 주역이란 게 일반적 분석이고 보면 독점의 횡포뿐만 아니라 독선의 횡포를 자유롭게 구가하고 있다는 주장이 무리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노 대통령의 사이버 폭력 엄단 방침에 토를 달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방법이다. '엄단' 과정에서 나타날지도 모를 '과욕'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검찰이 임수경 씨에게 '악플'을 단 25명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죄목은 모욕죄다. 고소권자의 고소 없이 검사가 공소하지 못하는 친고죄에 해당하는 죄다. 범위를 넓혀 명예훼손죄를 적용한다 해도 이 역시 친고죄다.


'악플'에 대한 일차 대응수단인 모욕죄 또는 명예훼손죄 모두 친고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부당국이 나설 여지는 제한된다.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정부당국의 '엄단'이 개시될 수 있다.

한계는 뚜렷하다. 그래서 사이버 폭력에 대한 대응은 '엄단' 이전에 '예방'에 집중하는 게 타당하다.

때마침 여러 포털 사이트가 예방책을 내놨다. 포털 모두 '악플'을 검색해 퇴치하는 게시판 관리자 인력을 늘리겠다고 한다. '네이버'는 이 조치 외에 '악플' 게시자의 ID를 누르면 이 사람의 블로그로 넘어가거나 작성한 댓글이 모두 나타나도록 할 방침이다 '엠파스'의 조치도 '네이버'와 대동소이하다.

민간 영역의 자율정화란 점에서 포털 사이트의 노력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부작용 우려도 있다. 핵심은 주관적 판단과 사생활 침해다.

'악플' 과연 누가 판단할 문제인가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를 친고죄로 규정한 이유는 모욕과 명예훼손에 대한 판단이 주관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가 겪은 고통을 최우선 고려사항으로 놓은 것이다.

문제는 포털 사이트의 조치가 이런 최소한의 제어장치를 마련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악플'에 대한 판단을 누가 하느냐가 문제다.

이 문제에서 비롯되는 더 중한 문제가 있다. '악플' 작성자의 ID를 클릭해 그의 블로그와 게시물 전체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모든 네티즌에게 부여한다면 예기치 못한 사생활 침해와 표현의 자유 위축 현상이 초래될 수 있다.

반론이 있을 법 하다. '악플'의 경우 입에 담기에도 거북한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글인 만큼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다는 반론 말이다. 상당히 타당한 반론이지만 재반박 여지도 없지 않다.

누가 봐도 '악플'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댓글이라면 게시판 관리자가 삭제하면 된다. 이 방법 외에 추가적 징벌을 가하는 게 타당할까? 흔히 얘기하는 '과잉금지의 원칙'은 이 경우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인가?

너무 깊이 들어간 걸까? 재반박의 취지는 '보완'이지 '부정'이 아니라는 점만 확인하자. 포털 사이트의 자율정화 노력은 배가될수록 좋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만 더 짚고 마무리하자. 정부가 '엄단'에 나서고 민간이 '자율정화'에 나선다고 모든 게 해결될까?

폭력과 범죄의 공통된 속성은 '따라하기'다. 첫 발걸음 떼기가 어려울 뿐이지 옆의 누군가가 버젓이 행하면 어렵지 않게 따라 하는 게 폭력과 범죄다.

그럼 이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을 연산군에 비유했다. 영화 '왕의 남자' 포스터를 패러디해 당보에 실었다. 한나라당은 패러디 취지가 '1·2개각'을 비판하려는 것이었고, 육두문자를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강변할지 모르겠으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역사가들이 연산군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고려하면 '무언의 욕설'이 깔린 '비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디 한나라당뿐인가. 청와대 또한 박근혜 대표를 '침대 위의 여자'로 비유한 패러디물을 공개한 바 있다.

공적 영역의 공적 담론 방식이 이 지경이라면 민간 영역의 '악플' 엄단 의지는 애초부터 '씨'가 먹히지 않는 얘기일 수도 있다.

"노약자나 어린이는 따라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시선을 집중하는 게 어린이 아니던가? '따라하기'의 빌미를 정치권이 끊임없이 제공하는 한 사이버 폭력 '엄단'은 구호에 그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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