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님은 왜 서 있기만 허유~ 아, 돼지 안 잡유?"

온 식구가 마당에서 고기 구워먹으며 즐거운 설을 보냈습니다

등록 2006.01.31 13:56수정 2006.01.3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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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와라. 돼지 안 잡냐?"
"벌써 잡유? 왜 이렇게 빨리 잡는댜. 알았슈 금방 가께유."


28일 아침을 먹는 데 구항에 사시는 큰 집 사촌형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올해도 역시 돼지 한 마리를 잡으실 요량인가 봅니다. 형은 형수님과 함께 먼저 큰 집으로 향하셨고, 저는 감기에 걸리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온 후에 큰 집으로 갔습니다. 큰 집에 가니 사촌형님들이 이미 돼지를 잡고 있었습니다.

"서방님은 왜 그렇게 멀뚱하게 서 있기만 허유. 아, 돼지 안 잡유?"
"어유, 전 못 허겼슈."
"그런 게 워딨댜. 하면 다 하는 거지. 이제 나이 든 형들은 그만 두고 서방님들이 해야지?"

멀리 떨어져서 돼지 잡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저를 보고는 큰집 사촌형수님이 한 말씀 하십니다. 돼지를 잡는 것은 항상 큰집 사촌형님 두 분과 저희 형, 그리고 작은집 사촌형님들과 당질들입니다. 같은 사촌이라 해도 아버지 연배가 되는 사촌형님들이다 보니 사촌형수님 말씀대로 이제는 돼지 잡는 고된 일에서 졸업할 나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비위가 약해서 그런지 도저히 돼지 잡는 일을 거들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수 노릇 하는 걸로 미안함을 대신하는 데, 돼지를 잡는 중간 중간에 소주 한 잔씩 따라드리고, 맛있는 부위가 나오면 얼른 숯불에 구워 소주 안주로 대령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돼지고기 구울 숯불을 만들어 놓는 것도 제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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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돼지를 다 잡고 나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입을 즐겁게 할 차례입니다. 마당 한 쪽에 장작불을 지피고는 갓 잡은 돼지고기를 숯불에 올려놓습니다. 석쇠에 고기를 올려놓고 굵은 소금을 착착 뿌리면 지글지글 고기 익는 소리와 연기가 입 안 가득 침을 고이게 합니다.

갈매기살, 안심, 등심 등 연하고 맛있는 부위만 골라 굽기도 하려니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운 좋게 한 점 먹으면 어찌나 그리도 맛있는지, 아이들은 연신 "또 주세요! 또 주세요!"를 외칩니다. 평소에는 고기를 잘 먹지 않던 애들도 이렇게 마당에서 먹는 재미가 있어서인지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먹으니, 지켜보던 엄마들은 당신 아이들 이참에 영양보충 시킬 욕심(?)에 고기가 익자마자 서둘러 집어가니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습니다.


"아휴, 형님! 그 고기 다 안 익었어요."
"다 익었어. 안 익었다고 하고서는 내가 내려놓으면 동서가 가져가려고 그러지? 안 속지."
"하이고, 형님도 참!"

"엄마, 또 줘."
"천천히 씹어 먹어."
"서방님 쪼기 고기 다 익은 거 아닌가? 저건 내가 찜 했어요 서방님!"
"아이고 정신없어. 나는 한 점도 못 먹었구만."


"아따, 잘들 먹네 그랴. 저기 있는 게 죄다 고기니께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들 먹고 가."
"다들 제 새끼 먹이느라고 정신없네, 정신없어!"
"그래도 이렇게 북적대는 애들이 있어야 명절 쇨 맛이 나는 겨. 실컷 먹어라 잉."

"그러지 말고 다음 명절에는 두 군데서 구우유. 그럼 이렇게 안 복잡하지."
"이 사람아 그게 아녀. 잔뜩 줘봐 맛있나? 넘치면 맛없는 겨 이 사람아. 이렇게 북적대며 먹어야 그게 맛있는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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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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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용

여기저기서 동시에 한 마디씩 하니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지, 고기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도무지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배가 조금 불렀는지 하나 둘 가마를 떠나서 소와 돼지 구경을 하러 갑니다. 숯불이 점점 약해지자 아이들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던 당질들은 번개탄을 살려서 다른 곳에서 구워먹다가 맛이 없다며 다시 이곳으로 오기도 합니다.

사촌형님들께서는 소주 한 잔 기울이시면서 이번 한식 때 할 묘 이장에 대해 말씀을 나누십니다.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는 산소를 이번에 한 곳으로 모두 옮길 예정입니다. 간간이 큰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한식(4월 6일)이 평일이다 보니 앞 당겨서 2일(일요일)에 하자는 말에 생일도 아니고 제사를 무슨 당겼다 미뤘다 하면서 지내냐고 의견충돌이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대로 편리하게 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제사를 옮길 수는 없다면서 한식날에 묘 이장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촌들 모두 참석하기도 하되 정 바쁜 사람들은 할 수 없고, 대신 참석 못하는 사촌들은 그 날 온 사촌들하고 일꾼들 막걸리 값이라도 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소를 많이 키우는 사촌형님들이 소 값이 많이 떨어졌다며 걱정을 하십니다. 자연스럽게 농촌 현실과 정치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집니다. 이야기하자면 길어집니다. 뭐, 정치 똑바로 하라는 것이지요. 정부도 그렇고 국회도 그렇고, 제발 국민 생각 좀 하라는 말이지요. 이번에 소를 열 마리 팔았는데, 마리 당 50만원씩 손해 봤다는 셋째 사촌형님은 단단히 부아가 나셨나 봅니다. 말로만 '국민, 국민'하지 말고 똑바로 하라면서 소주 한잔 들이키십니다.

분위기가 좀 험악(?)해지자 큰 사촌형님이 엉덩이에 묻은 지푸라기를 툭툭 털면서 한 말씀 하십니다.

"이렇게 온 식구가 모여서 고기 구워 먹이니께 좋기는 좋네 그려. 역시 설에는 이렇게 돼지 한 마리 잡아야 분위기가 산당께. 어이, 잘 먹었다! 그만 들어가서 얼큰하게 내장국 한 그릇 먹어야지. 어여들 일어나."

a 다들 방으로 들어가시고 둘째 사촌 형수님이 점심에 먹을 내장국을 푸고 계십니다. 장손도 아니면서 해마다 이렇게 고생만 하십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안 하십니다. 사촌들과 당질들까지 모이면 50여명이 넘습니다. 아무리 사촌 동서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그 많은 식구들 맞이하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다들 방으로 들어가시고 둘째 사촌 형수님이 점심에 먹을 내장국을 푸고 계십니다. 장손도 아니면서 해마다 이렇게 고생만 하십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안 하십니다. 사촌들과 당질들까지 모이면 50여명이 넘습니다. 아무리 사촌 동서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그 많은 식구들 맞이하는 게 보통 쉬운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 장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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