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과 함께 하는 삶의 결과 무늬

오정희의 <마음의 무늬>를 읽고서

등록 2006.02.02 20:25수정 2006.02.0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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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무늬》, 겉그림
《마음의 무늬》, 겉그림
책을 읽어도 그 뜻과 알맹이를 잘 모를 때가 있다.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그 속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은 때가 있다. 글을 쓴 이가 말 이음을 잘 못 엮어간다거나 앞뒤 흐름이 잘 맞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말로 풀어내야 할 만큼 어려운 낱말을 쓴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속에 무언가 모를 '깊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깊은 것이란 오랜 세월 동안 나무통 속에 곰삭은 포도주 같은 것이요, 진한 향내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 모진 비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찢기고 떨어져 나간 나무의 흉터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면서 빚어낸 열매들의 속 깊은 고운 빛깔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글 쓴 이의 마음 속에 새기고 담아 놓은 겹겹 무늬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 같은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글을 읽어도 글을 쓴 이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겹겹 두꺼운 천에 촘촘하고 꼼꼼한 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그 무늬를 어찌 쉽게 풀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수놓은 무늬가 사물이나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깃 든 것이라면 더욱더 힘들지 않겠는가.

오정희 님이 쓴 대부분의 책들이 그렇고, 최근에 그녀가 펴 낸 <마음의 무늬>(황금부엉이·2006) 또한 그렇다. 이 책에는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예순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 없는 인생 사계를 겪으면서 빚어낸 그녀만의 삶의 결, 그녀만의 마음 속 깊은 무늬들이 짙게 배어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다 다른 그 결이 보인다. 나뭇잎의 흔들림에서 바람의 존재를 느끼듯 우리는 변화로써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제까지 나이가 변모시킨 우리들의 얼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낸 시간의 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43쪽)

그녀의 얼굴 속에 담겨 있는 다른 결, 그녀의 마음속에 새겨 있는 깊은 무늬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수줍고 겁 많은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의 그녀를 당찬 문학소녀로 만들어 준, 그 시절의 담임 선생님이자 '글짓기 선생님'이셨던 임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의 교차, 그 속에 담긴 씁쓸함과 아득함이 그렇다. 그것은 또 1966년 봄부터 1995년 타계할 때가지 곁에서 배우고 익히며 창피를 당하면서 글을 갈고 닦고, 칭찬과 격려를 아낌없이 내리받았던 김동리 선생님의 슬하 30년 삶이 그렇다.


"세월은 덧없이 흐르는 것이라지만 마음을 실으면 아름다운 빛살과 무늬를 만들기도 하나보다. 기댈 곳 없이 마음이 허허로울 때,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은 절망감에 어쩔 줄 모를 때면 선생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다. 감당하기 힘든 일과 맞닥뜨릴 때 선생님의 판단과 조언을 정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233쪽)

그밖에도 그녀의 마음 속에 새기고 있는 겹겹 무늬들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많다. 이문구 선생이 그렇고, 손소희 선생이 그렇고, 김병익 선생이 그렇고 박경리 선생이 그렇다. 그밖에도 나이 지긋한 문학계 스승들을 비롯해 젊은 문학도들에 이르기까지 그를 문학인으로 이끌고 지탱케 한, 마음에 빚을 지게 한 분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들 문학계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녀가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 온 모든 상황과 순간들, 그리고 그 순간 순간의 삶 속에 연을 맺고 살아 온 모든 사람들이 실은 겹겹 깊은 결을 드러내는 삶의 무늬들이 아닐까 싶다. 전쟁통에 겪은 유년의 상처와 아픔들이 그렇고, 한 남편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시어머니 앞에 며느리로서, 그리고 강원도 춘천에 사는 한 시민으로 사는 모든 관계 망들이 참 결과 무늬로서 존재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다만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 있듯이, 그녀가 그려내려는 참된 삶의 결, 그녀의 마음 속에 담아내려는 깊은 무늬를 나름대로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문체가 남다르거나 사투리나 어려운 낱말들을 쓰는 까닭일까. 아니면 그녀만이 지닌 생각과 삶의 깊이가 전혀 다른 낯선 땅에서 사는 이방인의 삶인 이유일까?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그녀는 우리 땅 춘천에서 살고 있고, 우리들처럼 평범한 가정의 아내로 어머니로 며느리로 살고 있고,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그녀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독자들로 하여금 '참여하는 독서 행위'를 위한 까닭에서다. 이는 그만큼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독자들과 함께 생각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까닭이다. 그만큼 독자들을 위한 선택의 몫으로 그와 같은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한동안 창작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데, 언제쯤 그 소설을 펴낼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엿볼 수 있듯이, 독자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그 삶의 결과 무늬를 엮어내는 책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더 기다려 줄 수 있지 않겠나 싶다.

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황금부엉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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