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가난 자유 고독에의 충만을 노래하다

오정희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를 읽고

등록 2006.02.07 20:35수정 2006.02.0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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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소리 없이 소복이 내려앉은 눈처럼 마음을 적시는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는 얼마 전 신문을 보시고는 아버지가 주문하신 책이었다. 신문에 이 책은 어떻게 소개되었기에 아버지가 주문을 하셨을까 궁금해서 나도 책장을 펼치게 된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유년 시절의 기억

어릴 때 살던 동네 옆 중국인들이 사는 작은 언덕을 넘어 커다란 배들이 정박해 있는 선창을 지나면 제분 공장이 있었다. 해질 무렵이면 허리에 찬 빈 양철 도시락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언덕을 넘어오던 노무자들의 지친 발걸음과 그들의 긴 그림자, 밀가루가 얹혀 허옇게 세어 보이던 머리칼들은 어찌 그리 무섭고 슬픈 느낌을 주었던지. … 한두 살 터울의 형제들과 울타리 밖에 나앉아 장사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일들. - 본문 중에서



위의 글을 읽고 있자니 그의 소설 <중국인 거리>가 생각났다. 이 소설은 저자의 유년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인 모양이다.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어 그 순수한 눈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이 소설은 소설가 신경숙이 자신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신경숙은 소설 <외딴방>에서 저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는 스무 살 이후로 내 마음에 박힌 푸른 보석이었다.'

아내로 엄마로 소설가로 살아오면서 변변한 작업실 하나 없이 조리대 옆에 책상을 마련해놓고는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를 흉내내어 '존재의 테이블'이라 이름지어 그곳에서 소설이며 가계부를 썼다는 이야기, 밖에서 소설 쓰기 재료를 얻느라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벌써 저녁 밥 지을 때가 지나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이고, 바쁘게 밥을 하니까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나더라는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글쓰기가 곧 삶 쓰기

이제껏 내 삶의 두 축은 생활인으로서의 '살기'와 소설가로서의 '쓰기'였고 그 둘의 균형 잡기에 적지 않은 안간힘을 써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바로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 본분 중에서


'글쓰기가 곧 삶 쓰기'라는 저자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귓전을 맴돈다. 저자는 '글을 쓸 수 없는 삶이란 곧 죽음이라는 비장함을 지녔던 시절'도 있었다고 회고하는데, 저자에게 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삶이었다고 한다.


그의 소설 <바람의 넋>의 주인공인 은수씨에게 보낸 편지, 어린 날의 스승께 보낸 편지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많은 선생님들의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온다. 조곤조곤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큼 독자들은 이를 데 없이 편안한 마음의 상태가 된다. 아마도 산문의 매력은 이런 것인가 보다.

저자와 독자가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글이 바로 생활을 노래한 산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커피 이야기'에 나오는 글로 찻잔의 온기를 느끼면서 행복해하는 저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데, 커피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글이다.

나는 하루에 대략 석 잔 정도의 커피를 마신다. … 아침 일찍 그리고 밤늦게 마시는 커피는 미각의 즐김이라기보다 일을 위한 준비 작업이자 각성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청소나 빨래 등 집안일을 해놓고 깨끗이 치워진 집 안에서 한갓진 마음으로 혼자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생활 속의 작은 여유, 사치라 할 수 있다. 그때의 내 마음속에 스미는 따뜻한 온기와 향기, 적막감을 나는 감히 행복감이라고 표현한다. - 본문 중에서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곳곳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봄은 오고 있을 것이다. 봄을 맞이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따뜻한 산문집을 만나는 기쁨을 많은 이들이 공유했으면 좋겠다. '휴식으로서의 독서'에 알맞은 오정희의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는 부모님 세대에도 젊은이들에게도 행복을 선사할 반가운 책이었다.

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황금부엉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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