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에서 보물찾기놀이를 하다

[1박2일 경주여행(2)] 서남산 삼릉골, 동남산 미륵골, 탑골, 부처골

등록 2006.02.07 12:23수정 2006.02.07 15:32
0
원고료로 응원
여행을 하다보면 학창시절 보물찾기놀이라도 하듯 종종 찾는 데에 재미를 느낄 때가 있다. 폐사지에 홀로 서 있는 석탑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이 가장 크지만 다른 유물을 찾는 즐거움도 이에 못지않다. 지금이야 워낙 길 안내가 잘 되어 찾고자 하는 유물을 별 시행착오 없이 찾지만 예전엔 꽤나 수고를 감수했어야 했다.

경주남산엔 아직도 이런 즐거움이 남아 있다. 표지판을 보고 들어가도 막상 찾으려면 애를 먹는다. 보물찾기놀이 하듯 얼마간 찾아 헤매야 한다.


서 남산은 그래도 표지판이 잘 세워져 동 남산에 비해 '보물찾기'가 비교적 쉽다. 서 남산에서 제일 푸짐한 선물을 주는 보물은 배리 삼존불상. 삼릉골 '보물'을 먼저 찾고 마지막으로 배리삼존불을 찾아야 감동이 크다.

먼저 들를 곳은 삼릉과 경애왕릉. 삼릉은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데 남산의 능선과 삼릉의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그려 내는 정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삼릉은 충분히 들를 만한 곳이다.

삼릉 주변의 소나무 밭
삼릉 주변의 소나무 밭김정봉
경애왕릉은 삼릉 옆에 있다. 객사한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가 장사지내는 반장(返葬)도 하지 않은 듯 경애왕이 최후를 맞이한 포석정을 바로 옆에 두고 묻혀 있다. 빨리 올라가 다른 유물을 봐야한다는 생각에 쫓겨 이 곳을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오래된 소나무 밭의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한참을 머물러도 질리지 않는다.

소나무 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것이 석불여래좌상. 흔히 목 없는 석불좌상이라 부른다. 비록 목과 팔이 잘려 나갔으나 결가부좌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의연하여 흡사 초연의 경지에서 열반을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여민 매듭과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 주름은 자연스럽고 섬세하다.

삼릉골 석불여래좌상, 흔히 목 없는 석불좌상이라 부른다
삼릉골 석불여래좌상, 흔히 목 없는 석불좌상이라 부른다김정봉
얼굴 모양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려볼 수밖에 없는데 필시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 같다. 날카롭게 잘려 나간 모양이 누군가 계획적으로 파괴한 것 같아 더욱 안타깝게 하는데 그 주위를 한 아주머니가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었다.

이 불상을 중심으로 10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애관음보살상. 그 모습이 궁금하여 돌길을 박차고 오르자 환한 미소를 보낸다. 등 뒤로 가서 보살님이 보는 방향으로 똑같이 보기도 하고 밑에서 올려다보고 옆에 서 보기도 하지만 노여워하지 않고 그저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고 있다. 불그스레한 입술은 자연석 빛깔을 그대로 살려 냈다고 하니 절묘하기 그지없다.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자연석을 그대로 살린 붉은 입술이 인상적이다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자연석을 그대로 살린 붉은 입술이 인상적이다김정봉
파다가 지쳤는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선으로 윤곽만을 그려 넣은 마애선각육존불상. 세 번째 찾아낸 보물이다. 넓은 바위 면에 본존과 협시보살을 앞 바위와 뒤쪽 바위에 각각 새겨 놓았다. 본존불은 입상이고 양쪽 협시보살은 무릎을 꿇고 본존에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삼릉골 마애선각육존불상(앞 바위),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삼릉골 마애선각육존불상(앞 바위),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자유롭게 표현하였다김정봉
내친 김에 또 다른 보물을 찾아 위로 가려는 욕구가 솟구쳤으나 올라오기 전에 애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남겨 둔 보물, 배리 삼존석불입상을 찾아 서둘러 내려왔다.


배리 삼존불상을 얘기할 때 서산마애삼존불과 삼화령애기부처를 떠올린다. 모두 귀엽고, 천진하고, 해맑고, 부드럽고, 자애롭고, 친근하고, 앳되고, 아기 같고, 잔잔하고, 환하고, 인간미 넘치는 미소로 표현한다. 어느 한 가지 말로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려운데 그저 글재주 없는 나로서는 '신비로운 미소'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보호각 때문에 햇살의 방향과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미소를 볼 수 없다지만 석양빛이 비스듬히 비추는 저녁 무렵이면 삼존불의 참 미소를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보호각이 철거된다고 하니 만시지감은 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배리 삼존석불입상, 이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까? 귀엽고, 천진하고, 해맑고, 부드럽고, 자애롭고, 친근하고, 앳되고, 잔잔하고...
배리 삼존석불입상, 이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까? 귀엽고, 천진하고, 해맑고, 부드럽고, 자애롭고, 친근하고, 앳되고, 잔잔하고...김정봉
중앙 여래상은 사각형 얼굴에 뺨을 부풀게 만들어 제법 근엄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얼굴에 비해 부실한 하체와 짧은 다리를 보는 순간 근엄한 분위기는 사라진다. 왼쪽 보살상이 삼존불 가운데 가장 섬세하게 조각되었는데 오른쪽 볼의 까만 자국은 삼화령 애기부처 왼쪽 협시보살상의 깨진 코가 생각나게 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가까이서 불상만을 보아 지루할 때가 되었다. 눈이 답답하고 지루한 기분이 들 때 찾게 되는 것이 탑이다. 남산동 삼층쌍탑을 찾아 발길을 서 남산에서 동 남산쪽으로 옮겨 본다. 통일전을 정면으로 보고 왼쪽 칠불암 방향으로 몇 백 미터 가지 않으면 남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서 있는 삼층쌍탑을 만난다.

남산동 삼층쌍탑, 남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서있다. 크게 보이는 것이 서탑, 뒤에 있는 탑이 동탑이다
남산동 삼층쌍탑, 남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서있다. 크게 보이는 것이 서탑, 뒤에 있는 탑이 동탑이다김정봉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언뜻 보아서는 똑같은 탑이 한 쌍으로 서있는 것 같으나 기단부를 자세히 보면 다르다. 동탑(東塔)은 잘 다듬어진 여덟 개의 웅장한 돌을 어긋물리게 단층의 기단을 쌓은 반면 서탑은 이중기단을 쌓고 그 중 윗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을 조각해서 단조로움을 피했다. 동탑이 힘이 느껴진다면 서탑은 얌전하게 보여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 남산에 비해 인적이 드문 동 남산에는 미륵골, 탑골, 부처골의 골짜기가 있고 그 앞으로 남천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미륵골에 보리사가 있다면 탑골에는 부처바위가, 부처골엔 감실석불좌상이 있다.

남산동 삼층쌍탑을 등지고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먼저 닿는 곳이 보리사. 남산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서 깊은 절이나 대웅전을 비롯한 몇 채의 건물은 근래 신축하여 그다지 볼거리가 안 된다. 그러나 꼭 보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보리사 석불좌상이다.

석불사 본존불과 비교될 만큼 균형 잡히고 잘생겼다. 유리벽안에 고이 모셔진 석불사의 본존불과는 달리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모진 세월을 보낸 보리사 석불이 우리에게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문화재는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룰 때 더욱 아름답다. 항상 같은 조명과 온도, 같은 각도에서 보는 문화재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어두울 때나 환할 때, 춥거나 더울 때, 눈이 오거나 비가 올 때, 흐릴 때나 맑을 때, 그 때 그 때 제 모습을 달리하여 보일 때 더욱 감동을 주는 법이다.

보리사 석불좌상, 너무 잘생겨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보리사 석불좌상, 너무 잘생겨서 한참을 바라보았다김정봉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선호를 따지자면 희미한 조명아래 유리벽 안에 답답하게 갇혀 근엄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석불사 본존불보다 태양빛 아래 확 터있는 공간에서 뒤쪽 바위에 쌓인 소나무 낙엽을 배경으로 소나무를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인간적이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석불이 난 더 좋다.

사람의 욕심은 재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왕 보리사에 왔으니 욕심을 부려 마애여래좌상까지 가 볼일이다. 주차장 주변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경사가 급한 오솔길을 올라 숨이 찰 즈음 위를 보면 마애석불이 반가이 맞아 준다. 주변은 협소하여 마애불을 카메라에 담기도 어려우나 마애불이 지긋이 내려다보는 배반평야와 옛 서라벌의 전망은 일품이다.

미륵골에서 남천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탑골. 탑골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높이가 9m, 둘레가 30m쯤 되는 큰 바위에 탑, 불상, 승려, 비천상과 사자상 등 30여 점의 형상을 새겨 놓았다.

부처바위 전경, 스님도 한컷
부처바위 전경, 스님도 한컷김정봉
부처바위를 찾아 처음 대하는 면이 북면, 바위 너머 언덕으로 된 부분이 남면, 가파른 언덕을 타고 솟아있는 부분이 동면이고 오른쪽 협소한 면이 서면이다. 북면은 부처바위의 중심이 되는 면으로 두 개의 탑을 좌우로 배치하고 가운데에 석가여래 좌상을, 탑 아래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좌측 탑은 9층, 우측은 7층 탑인데 9층 탑은 황룡사의 구층목탑의 원형으로 황룡사탑을 복원하는데 이 탑을 원용하였다 한다.

서면에는 마애여래 한 분과 비천상이 있고 동면에는 삼존불상과 수도승상, 그리고 6구의 비천상이 있는데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 흰 눈썹을 한 수도승이 인상적이다. 남면에는 삼존좌불상과 얼굴이 반쯤 파괴된 채 서 있는 여래입상이 있다. 삼존불은 마멸이 심해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잘 보이지 않으나 전체적인 윤곽이나 앉아 있는 모양이 그저 천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두 협시보살이 본존상에 살포시 기대듯 앉아 있는 게 3형제 인형처럼 보인다.

부처바위 남면의 삼존좌불상, 삼형제상(三兄弟像)이라고 부르고 싶다
부처바위 남면의 삼존좌불상, 삼형제상(三兄弟像)이라고 부르고 싶다김정봉
탑골에서 굽어 흐르는 남천을 따라 조금 돌아오면 부처골. 여기에 남산 여행의 하이라이트, 감실석불좌상이 있다. 부처골 입구에서 평지와 다름없는 언덕길을 10분 오르면 산죽이 무성한 숲이 나오고 '도깨비수막새 표지판'의 안내에 따라 산죽을 걷어치우고 올라가면 비좁지도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터가 나온다.

그 터에 뿌리를 내린 자연석을 폭 1.2m, 높이 1.7m, 깊이 60cm정도 파내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석불을 새겨 놓았다. 예전엔 절이 있어서 찾는 이가 많았겠지만 언제부터인지 홀로 남게 되어 외로운 나날을 보냈으니 연민의 정도 느껴진다.

멀리서 보면 할머니 같기도 하지만 가까이 보면 중년 나이 정도로 보인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수줍어하는 듯하나 눈을 감고 꽉 다문 입은 야무지게 보여 도저히 범할 수 없는 대상으로 보인다. 인자한 미소 속에 감춰진 야무진 모습은 외아들을 홀로 기른 어머니 같은 인상이다.

부처골 감실석불좌상, 멀리서 보면 할머니로, 좀더 가까이 가면 중년 부인으로, 더 가까이 가면 어머니로 보인다
부처골 감실석불좌상, 멀리서 보면 할머니로, 좀더 가까이 가면 중년 부인으로, 더 가까이 가면 어머니로 보인다김정봉
돌아가는 길에 남산에서 본 불상들의 인상을 떠올리며 표정을 지어본다. 아내와 애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배리삼존불, 보리사 석불좌상, 부처바위의 삼존불, 감실석불 등을 떠올리며 입을 굳게 다물어 보기도 하고 입 꼬리를 위로 살짝 올린 채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떴다 해 본다.

연기 지망생들에게 경주 남산을 종주하면서 다양한 표정을 배우길 권하여 본다. 경주 남산은 최고의 연기 학원인 셈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3. 3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4. 4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5. 5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