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노동자' 다짐은 위선이었을까

파업 노동자 때문에 피해를 본 뒤 답답함을 느끼고

등록 2006.02.23 11:16수정 2006.02.2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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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이었습니다. 참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저에게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잠깐 소개해야겠는데요.

그냥 좀 들어주세요. 지금 저는 일본에서 석유 플랜트 디자인 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 어느 지역에서 석유 플랜트를 짓는다고 하면 저희 회사가 입찰을 합니다. 공사를 따게 되면 그 플랜트를 설계하여 다른 외국의 제조공장에 발주를 합니다. 그러면 그 외국 회사는 몇 백 톤이나 되는 그 큰 기계들을 만들어 중동 어떤 나라의 이름 모를 오너에게 넘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하는 일은 그 일이 잘 진행되는지 설계도 하고 진행 관리도 하는 뭐 그런 것입니다. 어느날 늘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데, 때마침 우리 회사에 발주를 준 회사가 한국 부산에 있는 어느 제조업체였어요. 저는 기분이 좋았지요. 이것도 애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한국의 외화 벌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는 일 년여 남짓 걸렸습니다. 그 일 년에서 한 열 달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거의 물건은 완성이 되었고 저는 기계가 잘 만들어졌는지 한국에 검사를 가게 되었지요. 오랜만의 한국 출장이라 마음은 들떠 있었고 한국 밥도 먹을 수 있기에 기대를 하고 가게 되었습니다.

공항에 부산 공장의 한 간부가 마중을 나오게 되어 있었지요. 그렇게 한국에 출장을 갔는데, 마중 나온 회사 간부가 우선 식사를 하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서 밥을 먹는데 그 분이 갑자기 하시는 말씀이 "지금 회사가 파업중이라 가셔도 검사를 할 형편이 안 됩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갑자기 듣는 말에 너무 놀라 뭐라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후 좀 정신을 차리고 "왜 파업을 하는데요?"라고 물으니, 그 분이 "저희 회사 전체 종업원이 240명 정도 되는데 그중 200명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세요. 그 분들이 정규직으로 바꿔 달라고 파업하는 중입니다"라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도 그 비정규직 분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시는지 그들에 대한 악담은 하지 않더군요.

제가 아는 대부분 회사의 높은 분들은 노동자들 인권은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한때 나도 노동운동가, 그러나 지금은 자본가 처지

여하튼 저는 공장으로 가자고 말했지요. 그리고 공장으로 갔습니다. 정말 공장엘 가보니 완성되지 않은 기계들이 나뒹굴고 있었지요. 그리고 파업을 하시는 노동자 분들은 서울에 있는 집회에 동참하기 위해 전부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제가 출장 온 목적인 제품 검사는커녕 납기일도 제대로 못 맞추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납기일을 못 맞추게 되면 적지 않은 돈을 벌금으로 저희가 물어내게 되어 있었거든요.

저는 부산 공장 사장님을 뵙고 어떻게 해야 될 건지 상의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장님은 "파업이 언제 끝날지 나도 모르겠다. 납기일 못 맞추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걸핏하면 파업하는 이 놈의 비정규직 인간들 다 잘라버릴 것이다. 돈은 손해 봐도 할 수 없다.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라며 저보다 더 흥분하여 소리를 버럭 버럭 지르더군요.

참 어처구니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때는 저도 한국에서 노동운동이라는 물을 먹어본 사람인지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군요. "비정규직이 돈 버는 기계냐, 돈을 벌면 버는 대로 공정하게 그들에게도 나눠줘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니냐"고 따졌지요. 제가 손님인지라 사장님은 조용해지더군요. 제가 의외로 몰아쳤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기계들이 완성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파업문제는 파업문제로 잠시 놓아두고 대책회의를 시작했습니다. 결론이 나왔습니다. 부산공장 사장님이 아는 다른 동종 업체로 이동해서 그 곳에서 기계를 완성하겠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습니다.

전화로 일본에 있는 저희 회사에 연락을 하고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한국 사람 신용 없다"라는 꾸지람을 엄청 듣고 저는 아무 성과도 없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지요. 일본에 돌아온 저는 그냥 눈물이 나더군요. 정말 예전에는 노동자만이 희망이다, 그들만이 세상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라고 굵은 팔뚝을 번쩍 번쩍 들어올리고 그랬었는데 말입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꼬락서니는 그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자본가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더란 말입니다. 파업하고 있는 분들이 솔직히 야속하다는 마음이 들었거든요. 언제나 제 마음 한편엔 지금은 자본주의의 한 톱니가 되어 그냥 무작정 돌아가고는 있지만 언젠가 때가 오면 머리띠 두르고 다시 거리로 달려갈 예비 노동자로 살아가야지 하는, 얄팍하지만 그런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런 제 마음의, 스스로에 대한 배신행위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앞으로도 아마 똑같은 일이 저에게 몇 번이고 벌어지겠지요. 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를 배신하면서 계속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저에겐 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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