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성욱 장편소설> 762년 - 9회

표류(漂流)

등록 2006.03.10 12:57수정 2006.03.1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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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노오토 호와 바짝 붙인 해적선에서 머리를 산발한 해적들이 몰려와 창검을 휘두르며 사라들을 몰아가고 있었다. 제대로 저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부관인 장영택이 칼을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자 창검이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이내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해적선에서 화살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 화살이 선실 바닥에 후드득 박혔으나 다행히 사람을 맞추지는 않았다.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양태사가 뒤에서 달려와 왕신복의 몸을 뒤로 밀쳤다.
"몸을 피한다면 어디로 간다 말이냐?"

"우선 목숨부터 부지하셔야 합니다."

"나보다는 고마오오야마(高麗大山)의 안전이 더 시급하다. 그는 일본이 우리 발해에 보낸 대사가 아닌가?"

"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양태사는 몸을 숙이며 급히 이물비우와 연결된 갑판 밑의 선실로 달려갔다. 그는 달려드는 해적들을 용케 피하며 그 중 한 명을 칼로 베기까지 했다. 무장다운 그의 모습이었다. 왕신복은 뱃집 뒤에 몸을 숨긴 채 해적선을 자세히 살폈다. 해적은 왜선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자신이 타고 있는 노오토 호가 바로 왜선이다. 이러한 왜선은 범선 갑판 위에 창문이 달린 뱃집이 있고 키와 노를 잡는 곳 또한 갑판 위에 달려 있다. 그런데 자신 앞에 다가와 있는 배는 그런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우선 뱃집 위에 뜸으로 지붕을 덮고 아래에는 문짝과 창문을 달고 있는 게 보였다. 뱃전 둘레에는 난간이 있었다. 이물 위에 닻줄을 감는 물레 있고 갑판 위에 큰 돛대를 세운 것이 신라배가 분명했다. 근래 신라의 국내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어부들이나 유민들이 해적으로 변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왕신복은 한 가지 강한 의문이 들었다. 바짝 붙어서 있는 이 배는 해적선치고는 그 규모가 너무 커 보였다. 해적선은 어민들이 타고 다니던 어선을 개조하거나 약탈한 배를 이용하는 게 보통이다. 때문에 배의 크기가 작을뿐더러 오래되고 낡아 속도를 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선 배는 해적선치고는 규모가 너무 큰데다 새로 건조된 듯, 참나무 향이 아직도 배어 있는 듯했다.


그는 귀를 기울여 그들이 쓰는 말을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해적들은 기합과 고함은 치면서도 쉽게 말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자세히 살피는 그들은 모두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점점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이야기를 들어봐도 해적이 얼굴을 가리고 노략질을 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문득 보통의 해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과연 누구인가? 정말 바다를 떠도는 해적이란 말인가? 끊임없는 의문이 왕신복의 머리에 떠오르며 혼란스러워졌다.

"좌윤 어른!"

그때 양태사가 빠른 발걸음으로 내려왔다.
"고마오오야마(高麗大山)는 선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면?"

"해적에게 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자는 이 배의 구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입니다. 해적들에게 발각되지 않는 어느 곳에 숨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왕신복 일행이 타고 있는 노오토호는 일본의 노오토(能登)에서 발해에 파견하기 위해 건조된 것으로 고마오오야마는 몇 달 동안 이 배에서 거하며 지내왔다. 해적의 침입을 알고 눈에 띄지 않는 은신처에 숨어 있을 것이란 게 양태사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우린 어떻게 해서든 일본으로 가야 한다."

"우리의 군세로 저들을 물리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양태사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노오토호에 타고 있는 사람 대부분은 칼 한번 잡아보지 않은 문인과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난폭한 해적과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왕신복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일왕과 귀족들에게 바칠 담비의 모피를 모두 저들에게 넘겨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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