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86회

등록 2006.03.13 08:16수정 2006.03.1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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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1 장 실수(失手)

갑자기 실내는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타오른 향연(香煙) 때문인지 아니면 욕실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때문인지 몰랐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더구나 그가 서있는 바닥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담천의의 내심을 짓누르는 것은 어느새 자신의 몸속에서 스물거리고 일어나는 욕념(欲念)이었다. 마신 차와 술에 들어있었다던 춘약과 미약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고, 유항은 지금까지 시간을 끌면서 그 시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뿌옇게 변한 방안은 돌연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타오른 유등의 불빛도 울긋불긋한 빛을 뿜어내는 듯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까지 서있던 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저 바닥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수십 개의 나상들이 살아서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상들이 비음을 토해내며 끈적한 유혹의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방안은 일순간에 온통 춘색(春色)으로 가득 찼다. 나상들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움직임에 따라 젖가슴이 출렁대고 여인의 비소가 슬쩍슬쩍 다가왔다가는 사라져갔다.

(이건 환영(幻影)일 뿐이다.)

내심 외쳤지만 환영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마치 심산유곡에 피어오르는 짙은 안개 속에서 선녀들이 하강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고, 목욕을 하면 물장난을 치는 듯도 했다. 모두 유항의 모습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자 그 상은 다른 얼굴로 바뀌기 시작했다.


유항의 얼굴은 곧 송하령으로 바뀌었고, 남궁산산의 얼굴도 보이는 것 같앗다. 서가화도 있었고, 황보옥도 있었다. 그가 만난 여자들의 얼굴이 모두 보이고 있었다. 그녀들의 나긋나긋한 섬섬옥수가 그의 몸을 간질이며 스치고 있었다.

(미혼진(迷魂陣).....!)


미혼진 때문임이 분명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실체를 파악하려 해도 다가오는 저 백옥 같은 나신은 어찌된 것인가? 자신의 몸을 스쳐는 여인들의 자극적인 감촉은 또 어찌된 것인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허나 이미 끓어오르는 욕화(慾火)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하초(下焦)는 부풀대로 부풀어 터질 듯 팽창해 있었다. 이미 심안(心眼)에 눈뜨기 시작한 그라 할지라도 지금 벌어지는 광경은 심안조차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사내에게 있어 정욕(情慾)은 먹는 것과 자는 것 이상의 본능적인 욕구. 더구나 춘약을 먹은 상태에서 사람의 의지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그의 눈빛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이지가 흐려지고 굳건한 의지마저 상실되어가고 있었다.

(안돼....! 이것들은 허상이다. 이 정도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나약했던가?)

자신을 꾸짖었다. 만약 저 허상에 빠져들었다가는 자신의 정혈이 고갈될 때까지 헐떡이다가 죽음을 당할 터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다시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하령....?”

그의 눈에 송하령이 벌거벗은 채 달려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속에서는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허나 그는 양 손을 벌리고 달려드는 송하령을 안고 있었다.

퍽----!

그 순간 불쑥 나타난 하얀 손은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가슴에 묵중한 충격과 함께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뒤로 물러서면서 몸을 틀었다.

쇄애액----!

푸른빛이 감도는 손톱을 세운 가느다란 여인의 두 손이 그의 허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아마 그가 몸을 틀지 않았다면 그 두 손은 등짝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고, 피를 토하자 오히려 혼미해지는 그의 정신을 잠시나마 일깨운 결과가 되었다.

츄우---악----!

그의 만검이 뽑히며 허공을 그었다. 허나 베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 살기를 느끼고 그은 것인데 마치 안개 속만 가른 셈이었다. 혈관에 터질 듯한 흥분과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그는 이 짧은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허상을 보는 눈보다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 나았다. 아니 이제 눈뜨기 시작한 심안에 의지하는 것이 정확히 상대를 느낄 수 있는 길이었다. 이것은 고수와의 대결보다 힘들었다. 이미 많은 고수들과 싸운 바 있었지만 이것은 그런 류의 싸움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서 맹렬히 끓어오르는 욕화와 심화는 그의 이성을 흐려놓고 있었다.

퍼퍽----!

그의 검에서 광채가 뿜어지며 허공을 베자, 돌조각이 허공에 비산되고 있었다. 다가오던 석상이 부셔져 나가고, 목상(木像)이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러자 방안을 가득채운 뿌연 기류가 조금씩 약화되는 듯 싶었다. 그에 따라 그의 움직임이 광폭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담천의의 몸이 휘청거렸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의 몸을 파고들며 진기의 흐름을 전신 곳곳에서 막히게 만들었다. 이것은 무슨 기운인가? 그는 혼미한 가운데서도 내심 섬뜩했다.

“............!”

이것과 비슷한 기운을 접해본 적이 있었다. 바로 송하령과 동굴에서 내려와 구양휘를 만나기 전에 어디선가 쏘아오던 무형의 기운. 부드러운 바람 같기도 하고, 전혀 거부감 없이 몸속을 파고들기는 했으나 상처도 나지 않고 흔적도 없으며 보이지도 않았던 그것.

대신 몸속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 진기를 끌어올리면 올릴수록 기혈이 들끓고, 대혈(大穴)마다 찢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던 그 무엇.

지금 이 기운이 그것과 다른 점은 자신의 몸속을 휘돌고 있는 진기를 자극하며 폭발시킨다는 점이었다. 마치 부드러운 여인의 섬섬옥수나 혀가 그의 몸을 애무하는 것처럼 그의 전신대혈을 자극해 본래대로 진기를 운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움직임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있었다. 허나 이 기운은 과거의 그것에 비해 성질도 달랐지만 위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진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다.

스으-- 츄악---!

일순 당황하며 검을 회수하는 그의 움직임이 둔화되자 예리한 비수가 불쑥 나타나 그의 어깨를 긋고 지나갔다. 살기를 느끼며 몸을 낮추며 피하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염력(念力)인가?)

그가 느끼는 순간 다시 그의 좌측에서 불쑥 하얀 손이 나타나며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담천의의 몸이 활처럼 휘면서 가까스로 그것을 피해냈다. 동시에 그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현저하게 무디어져 있었다.

(받아들여라..... 어떠한 기운이던 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떠한 기운이던 그것의 생성과 소멸은 모든 사물의 기운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는 깨달음을 통해 이미 자신의 내부에 있던 광폭한 기운을 동화시킨 적이 있었다. 그 기운이 자신의 혈맥에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면 그것과 동화해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파고드는 염력을 방어하거나 막으려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자신의 몸속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켰던 것과는 달리 조금씩 동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점차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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