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성욱 장편소설> 762년 - 11회

난파선(難破船)

등록 2006.03.14 18:51수정 2006.03.1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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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왕신복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 속은 아니었다. 그제야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이 배에 오른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깬 시각은 여전히 밤이었다. 잠시 잠을 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룻밤을 꼬박 여기서 쓰러져 잤다 말인가? 아니 며칠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극도로 체력이 바닥나 있었고 기력이 쇠잔해 있지 않았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휘청거리며 현기증이 일었다. 다리가 저려와 심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오랫동안 자고 있는 동안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이 상태로 누워 있었다 말인가?

몸을 일으켜 천천히 배를 살폈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있어 갑판 위를 대낮같이 밝히고 있었다. 갑판 한쪽 뱃집 위에는 뜸으로 지붕을 덮고 아래에는 문짝과 창문을 달아 놓고 있었다. 뱃전 둘레에는 참나무로 깎아 만든 난간이 있었다. 갑판 아래로는 구부리거나 바로잡은 긴 통나무를 걸어 사개로 물리게 해놓았다.

이물 위에는 닻줄을 감는 물레가 있고 갑판 위에 큰 돛대를 세운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돛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갑판 여기저기에 불에 그을린 자국이 나 있었고, 뱃집 한쪽은 반쯤 타버리고 문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배에 큰불이 났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인기척을 내보았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없어요."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일본어로 외쳤다. 역시 아무 기척이 나지 않았다. 하긴 이 배에 사람이 있었다면 며칠동안 누워있는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빈 배가 분명했다. 일순 긴장이 풀어진 왕신복은 갑판 한쪽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일단 자신은 살았다. 이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망막한 동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이런 배를 만나다니. 끝까지 하늘이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배를 잘 이용하여 일본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수로 배를 움직인단 말인가? 돛은 불에 타 없어지고, 자신 혼자 힘으로 노를 젓기도 무리였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어떤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딱히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급한 것은 이 배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일어선 왕신복은 배의 전체적인 모습부터 살폈다. 배는 무척 컸다. 백여 명이 승선하고도 남을 정도의 규모였다. 배 밑(底板)은 평평해 보였고, 이물(船首)과 고물(船尾)이 뭉툭하여 비교적 둔중한 모습을 한 평저형선(平底型船)이었다. 이는 필시 신라의 배가 분명했다. 이러한 구조는 흘수(吃水)가 낮아 조석(潮汐)의 변화가 많고 수심이 얕은 신라의 연안에서 활동하는데 적합한 구조인 것이다.

그는 갑판 위로 올라와 대충 배의 크기를 가늠해보았다. 큰 걸음으로 이물(船首)과 고물(船尾)의 거리를 재어보니, 족히 100보를 훨씬 넘겼다. 배의 가로 폭은 20걸음에 가까웠다. 배의 이물(船首)과 고물(船尾)이 넓고 평평해 보였다. 그는 갑판에 앉아 그 재질을 직접 만져보았다. 상수리나무로 만들어 삼판이 단단했다.

삼판과 삼판 사이에는 목재 못을 사용하여 연결시켜 놓았다. 목재 못은 처음 배를 건조했을 때는 강도가 약하지만, 철제 못에 비해서 부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철제 못과는 달리 시간이 경과해도 나무 사이에 틈이 벌어지지 않는다. 배가 만들어진 양식으로 보았을 때 신라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신라에 이렇게 큰 배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문득 이 배의 용도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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