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 모란공원에 모셔진 김귀정 열사의 묘소 앞에 놓인 영정 사진.김귀정추모사업회
"임시 과대표 할 사람 없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1991년 대학 신입생 시절, 나는 결국 그렇게 사고를 쳤다. 스물한 살 재수를 한 새내기가 겁도 없이 일을 저지른 거다. 하지만, 그 '스스로 과대표' 사고를 빼면 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여학생들과 미팅도 하고 모꼬지도 가고 막걸리를 벗 삼아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그 해 3월과 4월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새내기였던 강경대가 시위 도중 사망했다. 알고 보니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 도중 백골단(사복 전경)의 구타로 숨을 거뒀다고 했다. "신입생이 죽었어? 왜?"라는 의문은 "민주화 요구한다고 사람을 때려죽여?"라는 분노로 이어졌다. 그날 이후로 노태우 퇴진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시위는 거세어졌고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그리고 한 달 후인 5월 25일, 서울 대한극장 앞에서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 현장에서 학교 선배였던 김귀정이 죽었다. 텔레비전에서 그 소식을 접한 나는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시신이 안치된 병원으로 갔다. 이제 나는 더는 대학의 낭만을 즐기는 새내기가 아니었다. 아침저녁으로 학교가 아닌 거리를 뛰어다니며 정부의 폭력을 규탄했고 지하철을 누비며 모금 활동을 펼쳤다. 밤이면 김귀정 누이의 시신을 탈취해 타살이 아니라고 우기려는 공권력에 맞서 병원을 지켜야 했다.
그랬다. 나의 20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스스로 과대표'와 김귀정 누이 사건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했다. 그리고 정의는 지켜져야 한다는, 다소 거창하게 들릴 수 있는 명제를 세우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20대에는...
사회에선 불합리한 관행에 쉽게 순응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진출했을 때만 해도 '돈만 좇는', 사회 불합리한 것들에 순응하는 삶을 살지는 않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스물아홉 나이로 내가 사회에 첫 발을 디뎠던 때는 IMF의 암흑이 대한민국을 휘감았던 1999년이었다. 암울했다. 먹고 사는 게 힘겨워 보였다. 그래도 일은 해야 했다. 밥벌이를 해야 했다. 그때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창업'이었다. 사람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 사업하지 말고 회사 들어가 월급이나 받고 편하게 살라고 했지만 스스로 힘으로 정직하고 당당하게 돈을 벌어 보자는 포부가 더 강했다.
그러나 마음만큼 쉽지 않았다. 나는 때때로 적당히 타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괴로워했다. 작은 회사이긴 하지만, 분명 자본주의 사회 한가운데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이겨내고 수익을 만들어야 하는 경영자로서, '사업'을 유지하는 것과 '정의'를 지키는 것 사이에서 쉼 없이 충돌을 경험해야 했다.
내가 처음 접대를 나간 것은 어느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과의 자리였다. 계약이 성사된 것을 축하하는 식사자리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저녁 식사에서 단란주점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그쪽에서는 '업무상 자연스럽다'고 여겼고, 나는 '사업상 부득이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20대일 때 어느 선배가 그런 '짓'을 했다면 "정신 차려요, 선배. 뭐예요?"라고 쏘아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또 다른 '사업상 부득이'한 조치는 계속됐다. 자금이 필요하거나 일을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 안 되는 줄 알면서 소위 '기름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투명하게 바뀌어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가끔 고민한다. 연세가 조금 있으신 분들은 아직도 "얼마씩 찔러 주면 되지 않겠어?"라고 당연하게 말하니까.
한번은 용도 변경을 통해 정부지원금을 어느 정도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 게 나쁜 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당장 현금이 필요하니까 서류만 완벽하게 맞춰서 정부에 보고만 하는 거다. 거기에는 "액수가 그리 큰 것도 아니고 대규모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뭐"라는 자기합리화가 있었다.
몇 년쯤 지난 뒤 다행히 접대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다. 접대하나 안 하나 결과는 똑같았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관공서도 예전처럼 노골적으로 접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체가 죄악이라는 명확한 진실이 나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근로기준법 위반, 나는 악질 경영자?
그나마 나 스스로 위안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자신만의 치부를 위해 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도 똑같은 노동자다,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주자'고 생각하면서 급여나 복지 부분에서 최대한 좋은 조건을 갖추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2003년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급여도 몇 달씩 체납됐고 당연히 직원들과 갈등도 생겼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월급 한두 달 밀리면 당장 먹고 살기 막막해지는 월급쟁이니까…. 결국 더는 어렵다고 생각한 나는 몇몇 직원들에게 이직을 권고했고 그들은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는 고소가 들어왔으니 조사를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그것도 근로기준법을? 알고 보니 그만둔 직원이 급여 체납으로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고 고소한 것이었다.
'아, 이제 그 근로기준법도 준수하지 않는 악질 경영자까지 된 건가?'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는 딱지가 붙으니 씁쓸했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번도 임금을 체불한 적이 없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 더욱더 '안정적인 자금 확보'를 위해 '사업상 부득이한' 조처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양심적인 대표이사 되기,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