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 남편의 석방을 위해 1인 시위에 나선 나.박미경
해고 후 남편은 매일 회사 앞에서 사원들의 출·퇴근과 점심시간에 맞춰 하루 2, 3번씩 1인 시위를 했습니다. 남편이 싸움에 나서면서 경제 상황이 나빠지긴 했지만 저는 집회에 필요한 방송 장비나 경비 등에는 절대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느라 남편 싸움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데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요.
워낙 끼니도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아끼면서 사는 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수돗물을 아끼기 위해 빗물을 최대한 모아 활용하고, 2천 원짜리 슬리퍼도 꿰매 신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하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나오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화도 나고 슬슬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물건을 남에게 잘 빌려주지 않는데 남편은 카메라건 차량이건 잘도 빌려줬습니다. 여러 사람 손을 전전하던 카메라는 결국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차를 빌려간 사람이 신호위반, 주차위반에다 큰 사고를 내도 모두 제 돈으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보험료까지 껑충 뛰어올랐지요. 그리고 집회나 기자회견을 하면 업무방해를 했다는 죄목으로 심심찮게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투쟁하는 데도 돈이 들더군요.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이 바닥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2001년 남편은 미안했는지 장사를 하겠다며 차를 팔아 중고 트럭을 사서 백만 원을 들여 탑을 적재했습니다.
그리고는 삼성 SDI 건너편 인도에서 포도 장사를 하면서 복직투쟁을 했는데 2001년 11월 결국 업무방해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두 번째로 구속됐습니다. 결국 탑차는 기름값만 많이 드는 쓸모없는 쇳덩어리가 됐고 출소 후에는 남편 건강도 좋지 않아 틀렸다 싶어 탑을 떼어 버렸습니다. 힘들게 번 돈으로 탑을 붙였다 떼었다, 쇼를 한 겁니다.
아이가 아플 때 남편은 집에 없었습니다
노동운동에 빠져들면서 남편에게 가족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특히 툭하면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가게 보랴 아이 보랴 정신없이 있다가 아이가 목을 못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병원에 가려고 남편에게 전화해 어디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지금 창원 가고 있다."
갈수록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은 줄어들었습니다. 이상한 건 남편이 없을 때마다 영양실조 끼도 있고 허약했던 아이가 자주 코피를 흘리고 아팠다는 겁니다. 한밤중에 아이를 둘러업고 혼자 쩔쩔매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특히,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왜 안 오냐며 아이가 울먹일 때는 정말 난감했습니다. 언젠가는 아빠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난다며 아빠 사진을 들여다보느라 잠도 자지 않더군요. 아빠 생일날에 꽃 한 송이를 주고 싶은데 아빠가 철창 안에 있어서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딸은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 나 가슴이 아프다. 왜 그래?"라고 하더군요.
2003년 6월 출소한 지 얼마 안 돼서 또 일이 터졌고 남편은 다시 바빠졌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아빠를 만난 아이는 방문 앞에 서서 "아빠, 가지 마세요. 제발 가지 마세요"하며 악을 쓰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안해하며 집을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