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낀 어느날 아침, 우리 집 옆 둥그나무. 요즘은 사는 게 침침한 안개 속 같습니다.송성영
좀처럼 짖지 않는 우리 집 개들이 짖기 시작했습니다. 옆 산 쪽을 향해 짖고 있었습니다. 불법적으로 산을 까뭉갠 산 주인이라는 사람이 또 다시 나타났던 것입니다. 얼마 전 시에서 관련 공무원들이 찾아왔습니다. 산을 둘러보더니 전혀 신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산을 까뭉갰다며 적당한 조처를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산 주인은 시에서 조사를 나왔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이번에는 낯선 사람 둘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라크를 폐허로 만들어놓고 럼즈펠드? 럼주필드인지 그렇고 그런 전쟁광 패거리 몇몇을 데리고 희희낙락 시찰 나온 미국의 부시처럼 말입니다.
손짓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뭔가를 설계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산을 완전히 까뭉개고 그 자리에 뭔가를 세워 보겠다는 청사진을 펼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함께 온 그들 역시 땅 투기꾼들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산 주인을 향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놈처럼 고래고래 소리쳤습니다.
"이것 봐요! 한번 해보자는 거요, 뭐요!"
"뭘요?"
"우리 밭, 당신들이 굴착기로 뭉갠 밭, 원상복귀 해준다고 했던 게 열흘이 넘었잖어! 이 양반들아!"
"아, 그거, 해줄게요, 해줄게, 내일 당장 해줄게요."
"이 양반이, 또 내일여! 벌써 몇 번째 거짓말하는 거요!"
굴착기로 밭을 짓뭉개놓고 당장 원상복귀 해준다던 사람이 열흘만에 얼굴을 내밀고 또 다시 내일로 미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능청스럽고 뻔뻔했습니다. 내 땅도 아닌 남 땅을 빌려 맨땅에 헤딩하듯 일일이 삽으로 파헤쳐 기름지게 만든 소중한 밭인데 땅 투기꾼들은 '그깟 밭고랑' 까뭉갠 것이 뭐 대수냐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일구는 밭은 그냥 밭이 아닙니다. 기계로 쓱 문대고 기계로 씨 뿌리는 그런 밭이 아닙니다. 농약은 물론이고 화학비료 한 알 주지 않았습니다. 질 좋은 퇴비를 통해 자란 미생물들이 우글거리는 '생명의 밭'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 턱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겐 '너 밭이냐, 나 굴삭기다' 식으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면 그만인 것입니다. 새만금 갯벌이 사라져 갈 위기에 놓여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런 추잡한 자본주의식 논리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산 주인의 멱살을 틀어잡고 개울가로 내동댕이치고 싶을 정도로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참았습니다.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려, 하루만 더 참아 보자.' 내가 무슨 만화영화의 거시기 소녀 캔디도 아닌데, 참고 또 참았습니다. 캔디처럼 착하게 참은 것이 아니라 버럭버럭 화를 내며 멱살을 쥐어틀고 싶은 심정을 눌러 참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지무지하게 화를 냈던 그날 저녁부터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에 열이 나고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어지간하면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인상이 녀석이 나와 나란히 서서 밭 가장자리에 오줌 거름을 주면서 그럽니다.
"삭신이 쑤시고 머리가 어질어질해."
"삭신? 헤 자식이, 괜찮아. 좀 있으면 나을 거여."
"근디 아빠는 전생에 장비였나벼."
"언제는 관우라더니? 어째서 이번에는 장비여?"
"장비처럼 수염도 많이 났고, 화나면 목소리가 엄청 커지잖어."
"술 먹은 장비처럼? 아빠 화 내니께 무섭디?"
"응."
"아빠 화나면 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러지, 불안하고."
"응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
"그래서 우리 인상이가 아픈 거로구나, 금방 나을 거여, 아빠가 미안하다, 이제 화 안 낼게. 아예 안 낸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어지간하면 화 안 낼게."
인상이 녀석은 최근 몇 년 동안 과잉치아 때문에 찾아간 치과를 제외하고는 병원에 가본 기억이 없습니다. 큰 아이 인효만큼이나 건강한 아이입니다. 3년 전부터는 아예 독감 주사조차 맞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다 배탈이 나거나 환절기 때 감기를 앓긴 하는데 그래 봤자 1년에 서너 차례입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몸살을 앓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렇게 건강한 녀석이 내가 어쩌다 큰 소리를 내지르게 되면 끙끙 앓게 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경우가 두세 차례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내가 아내와 심하게 다툴 때도 녀석의 몸이 갑자기 뜨거워졌습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녀석이 형하고 심하게 다투다가 갑자기 괴물처럼 변한 아빠에게 매우 놀라 그 다음 날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녀석은 누군가가 크게 화를 내면 잘 견디지 못합니다. 그토록 건강한 촌놈이 왜 그리 약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인상이 녀석은 산에서 뛰어 노는 산토끼나 다름없었습니다.
산토끼는 집토끼보다 더 예민하고 더 쉽게 놀라고 상처받습니다. 건강하지 않아서, 몸이 허약해서 상처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놀래는 사람들의 기운이 너무나 독해 쉽게 상처받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독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그날 그렇게 산토끼나 다름없는 인상이 녀석은 내 화기에, 독기에 중독된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던 그날 저녁 인상이는 두 번째로 아빠의 화통 삶아 먹은 큰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닭 모이를 주는데 갑자기 닭들이 뛰쳐나왔고 그 닭을 우리 집 개, 곰순이가 왕왕 물어뜯었던 것입니다. 뒤쫓아가 물지 말라고 호통을 쳤는데도 계속해서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러잖아도 심기가 뒤틀려 있던 나는 곰순이 녀석의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벼락같이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채 호되게 다뤘습니다.
산주인 때문에 쌓인 독기를 곰순이에게 풀었던 것이었습니다. 산에서 뺨 맞고 집에서 화풀이한 격이었지요. 참으로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혼쭐이 난 곰순이는 송곳니를 감추고 놀란 기색도 없이 온순한 강아지로 돌아왔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인상이는 달랐습니다. 인상이 녀석은 평소와는 다른 아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척 놀란 모양입니다. 녀석은 그날 저녁 내내 아빠 근처로 오질 않았고 속이 아프고 열이 난다고 했습니다.
건강 체질인 만큼 녀석은 하루 만에 거뜬하게 나았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녀석이 그럽니다.
"아빠, 오늘 선생님이 그러셨다. 니들 개 건다리지 말어라, 잉."
녀석은 선생님의 진한 충청도 사투리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말수가 별로 없는 녀석이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 말투를 흉내 낸 것이 재밌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시켜 보았습니다. 녀석은 하라는 대로 반복해서 합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다구?"
"쫌 아까 했잖어."
"에이, 그래두 한번만 더 해봐라, 잉."
"니들 개 건다리지 말어라이."
얼마 전 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말라무튼지, 시베리아 거시긴지 뭔지 검고 큰 개에게 과자를 건네주려다가 손을 물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개를 건드리지 말라'고 주의를 준 모양입니다.
나는 문득 아이의 손을 문 그 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기 품은 개. 그 개는 분명 누군가에게서 화가 나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정작 물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는데,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아이를 어쩌다 물었을 것입니다. 독기를 주체하지 못해 결국 인상이를 물어뜯고 말았던 나처럼 말입니다.
산 주인이 내 밭을 원상복귀 해주겠다고 네 번째로 약속한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 날, 그렇게 사흘 나흘이 지났지만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당장 감자를 심어야 할 터인데 굴착기로 짓뭉갠 밭은 삽날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딱딱하게 짓뭉개진 밭을 보면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진정시켰습니다. 싸울 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면 백전백패 아니겠습니까? 어쩌겠습니까? 오늘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감자 심을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작정하고 부지런히 거름을 냈습니다.
나는 이미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내가 이삿짐을 싸는 날까지 땅 투기꾼들과 싸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번 싸움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먼저 내 안에 평화와 여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이 험난한 세월을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여유롭게 준비하고자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을 놓고 있습니다.
'불법적으로 산을 짓 까뭉갠 사건'을 처리해야 할 담당 공무원들은 과연 얼마나 더 질질 끌다가 조처를 내릴지, 산 주인은 굴삭기로 짓뭉갠 내 밭을 언제쯤 원상복귀 해줄는지, 오늘처럼 부지런히 밭을 일구면서 당분간 허허실실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럴싸하게 마음을 냈지만 일 처리를 질질 끌고 있는 담당 공무원들과 거짓말을 일삼는 '땅투기꾼'들이 나타나면 그게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건다리면 무는' 개처럼 내 안의 독기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 분노로 인해 우리 아이들을 더는 아프게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우리 아이들이 분노라는 독에 감염되어 상처받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싸움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싸움은 결국 우리 아이들을 위한 싸움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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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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