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도토리 다 어디 갔나 했더니...

어리석은 산짐승이 숲을 만듭니다

등록 2006.03.26 14:16수정 2006.03.2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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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집 작은 산도적, 나무짐을 멘 큰 아이 송인효. 어깨가 땡긴다나 뭐래나.

우리집 작은 산도적, 나무짐을 멘 큰 아이 송인효. 어깨가 땡긴다나 뭐래나. ⓒ 송성영

나는 매일 같이 산에 오릅니다. 높은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는 등반가나 산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기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는 경지 높은 도인 흉내를 내고자 산에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산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산비탈 밭에 오르지 않으면 먹을거리가 굴러들어오지 않게 되고 땔감을 구하지 않으면 방구들을 덥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80킬로그램이 넘는 체중에 늘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펑퍼짐한 얼굴.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산도적처럼 생겨 먹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나는 산도적입니다. 나는 생긴 대로 굴러먹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칭으로 부르는 그런 산도적이 아닙니다. 나는 진짜 산도적놈입니다. 산에서 많은 것들을 도둑질해 옵니다.

산을 지키는 산신령의 허락도 없이 산 고사 한 번 지내지 않은 놈이 먹고 잠자는 어느 정도를 산을 통해 해결하고 있습니다. 밑천 한푼 들이지 않고 말입니다. 이런 '날 강도'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도 눈곱만치의 양심은 남아 있어 가능하면 멀쩡한 나무는 베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눈더미에 못 이겨 부러지고 짖겨진 나무, 다른 나무들에 치여 밑둥이 썩어 나자빠진 나무, 어쩌다 산소 자리 만들겠다고 베어 놓은 나무들을 땔감으로 쓰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나무를 벨 상황이 닥치면 나무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구들장 덥혀 잠 잘 자고 그 기운을 좋은 데 쓰겠노라며 내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남들은 산더미처럼 땔감을 쌓아 놓아야 맘 편하게 한 겨울을 난다지만 나는 아궁이 옆에 사나흘치 땔감만 있어도 맘이 편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내가 게을러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리석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춥지 않을 때 땔감을 쌓아 놓게 되면 한겨울을 편하게 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엄동설한에 그런 생고생을 하는가, 참으로 어리석다는 눈총을 보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나는 어리석습니다. 하지만 어리석게 사는 게 두루 두루 뱃속 편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어리석은 산도적놈의 속내를 잘 모릅니다.

시골 생활에 접어들 무렵에 나 역시 몇날 며칠꺼리의 땔감을 쌓아 놓고 겨울을 날 때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숨을 헐떡거리며 지게질을 했습니다. 지게에 땔감이 많을수록 숨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습니다. 마당에 지게를 내려놓고 나면 신음소리가 저절로 기어 나왔습니다.


"어이구 죽겠네."

그러던 어느 날 지게를 지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추세워 가며 산을 내려오다가 문득 지게의 무게는 내 욕심의 무게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밤낮으로 돈벌이에 몰두해야만 했던 도시 생활을 청산할 당시 진즉에 덜어 놓았다고 여겨졌던 내 욕심의 무게가 여전히 지게 위에 묵직하게 올라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좀 더 편하게 겨울을 나기 위해 좀 더 많은 땔감을 지게 위에 실으려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게질을 하고 나면 허리며 다리에 무리가 갔습니다. 도시 생활하면서 좀 더 많이 벌어들인 대가로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갔듯이 말입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이 내게 눈총을 주거나 말거나 나는 어리석게도 거의 매일 같이 꾸역꾸역 산에 올랐습니다. 눈발이 내리든 말든 산에 올라 가뿐한 발걸음으로 하루치 정도의 땔감을 구해 오곤 했습니다.

"에이그 그것도 땔감이라고..."

사람들은 참 게으르다며 표 나지 않게 혀를 차지만 나는 오히려 게으르지 않기 위해 땔감을 쌓아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땔감을 쌓아 놓지 않기 때문에 거의 매일 같이 산에 올라야 하고 결국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을 말입니다.

지게 짐이 가벼우니 더 이상 다리가 후들거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후들거렸던 다리에 부쩍 힘이 생겼습니다. 지게 작대기 장단에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산비탈 농사를 시작하고부터는 산에 올라 땔감만 장만해 오는 게 아닙니다. 부엽토도 한 자루씩 담아 옵니다. 부엽토는 화학비료와 농약을 전혀 쓰지 않는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내게 아주 유용한 양식입니다.

a 부엽토에 숨겨진 도토리, 산짐승들이 가장 실한 놈들만 숨겨 놓았다.

부엽토에 숨겨진 도토리, 산짐승들이 가장 실한 놈들만 숨겨 놓았다. ⓒ 송성영

부엽토와 쌀겨, 그리고 효소를 섞어 미생물을 발효 시킨 '섞어 띄움 거름'은 땅을 기름지게 만듭니다. 땅이 살아나면 사람의 기운도 살아납니다. 사람의 기운이 살아나면 땅을 죽이려 들지 않습니다. 사람과 땅, 모두가 건강해질 수 있지만 좀 더 적게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의 논리에서 본다면 아주 어리석은 짓이지요.

산에는 나만큼이나 어리석은 짐승들이 많습니다. 푹신하게 쌓여 있는 낙엽들을 거둬 내고 부엽토를 긁어모으다 보면 토실토실한 밤이며 도토리들을 수없이 발견합니다. 청솔모나 다람쥐와 같은 산짐승들이 두고두고 먹겠다고 숨겨놓은 저장 식량들입니다.

"그 많은 밤, 도토리들이 어딜 갔나 했더니, 햐 새끼들, 죄다 숨겨놨구먼."

a 요즘 같은 봄날, 부엽토 속에서 도토리들이 부지런히 싹을 틔우고 있다.

요즘 같은 봄날, 부엽토 속에서 도토리들이 부지런히 싹을 틔우고 있다. ⓒ 송성영

숨겨 놓은 산짐승들의 식량은 신기하게도 흠집이 거의 없는 가장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벌레에 먹히지 않으려고 온갖 고약한 '독약'들을 살포해 밤을 저장해 놓지만 부엽토 속에 저장해 둔 녀석들의 식량은 벌레에 갉아 먹힌 흔적은 물론이고 전혀 썩지도 않았습니다.

녀석들의 식량은 사방팔방에 두세 개씩 널려 있었습니다. 산자락 곳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녀석들은 자신이 숨겨놓은 식량들을 다시 되찾아 먹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한두 군데로 모아 두며 찾기도 쉬울 터인데 참으로 어리석은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녀석들이 다 먹지 못할 양식, 나는 녀석들의 식량을 슬쩍 도둑질해 올까 싶다가 차마 가져오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묻어 놓습니다.

어느 날, 지게를 받쳐 놓고 소나무 아래에 누워 있다가 어린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린 소나무들이 아니었습니다. 참나무의 어린 새싹들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산짐승들이 감춰놓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도토리가 싹을 틔워낸 어린 나무들이었습니다. 내 입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a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도토리 어린 나무. 산짐승들이 부엽토 속에 감춰 놓았던 바로 그 도토리가 자란 것이다.

소나무 밑에서 자라는 도토리 어린 나무. 산짐승들이 부엽토 속에 감춰 놓았던 바로 그 도토리가 자란 것이다. ⓒ 송성영

산짐승들의 어리석음이 숲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산짐승들의 어리석음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짐승들의 어리석음이 없었더라면 숲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나처럼 영악한 인간이었다면 그 열매들을 한군데에 모아두었다가 죄 파먹었을 것이고 숲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한 해 먹을 식량만을 저장해 놓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숲을 저장해 놓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생태전문 월간지 <자연과 생태 www.econature.co.kr> 2006년 4월 창간호에 보낸 내용을 수정해서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생태전문 월간지 <자연과 생태 www.econature.co.kr> 2006년 4월 창간호에 보낸 내용을 수정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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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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