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96회

등록 2006.03.27 08:17수정 2006.03.2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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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3 장 오룡기출(五龍旗出)

여후량은 사내로서 가장 치졸한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그래도 십년을 넘게 한 이불 덮고 살을 섞은 아내의 목숨을 위협해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면사철부(免死鐵符)로 인하여 열흘간의 시간을 주어진 그가 그동안 궁리해 벌인 짓 치고는 삼류무사라도 하지 않을 치졸한 이런 짓거리였다.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하나 부부의 사이마저 떼어놓을 수는 없는 일. 더구나 면사철부는 열흘이란 기간동안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그가 이런 짓을 할 것이라 예측 못한 잘못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바로 철혈보의 보주인 독고문의 누이동생인 독고향(獨孤珦)이었고 독고상천의 고모였으니 마지막 발악하는 무기로는 꽤 쓸만한 인질인 셈이다. 독고향은 무공과 관련이 없는 여자였다. 철혈보의 독고가에서는 여자에게 가문의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사천 당가에서 여식에게만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 독술을 익히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체질적으로 무공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은 여후량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독고향의 오른팔을 꺾고 그의 왼팔은 독고향의 허리를 감아 당기고 있어 그의 가슴과 독고향의 등이 밀착되어 있는 상태. 번뜩이는 비수의 새파란 날이 독고향의 목젖에 닿아있었다.

"자네는 끝까지 노부를 실망시키는군."

진독수와 함께 방 안에 들어서는 육능풍이 나직하지만 노기 띤 음성으로 꾸짖었다. 실망이었다. 차라리 모든 사실을 밝히고 목숨을 구걸했다면 오히려 난감했을 터였다. 보주가 없는 가운데서 극형을 집행하기도 어려워 아마 목숨만큼은 부지해 주었을 것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었소. 나에게는 할 일이 있고, 내가 해야 할 몫이 있소. 대의를 이루기 위함인데 무슨 짓을 못하겠소?"

"무엇인가? 무엇이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영민한 두뇌를 마비시키고 예리한 시야에 검은 천을 덮게 만들었는가?"


육능풍은 비웃음이나 경멸보다는 차라리 안타깝다는 기색이었다. 여후량이 지금까지 보여 준 지혜와 재능은 그의 말대로 그 누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여후량을 배반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인간에게는 끝없는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 그가 누리는 부와 권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얻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신념이오. 사내가 길다고 하면 길 수 있고, 짧다면 짧은 한평생을 살면서 호의호식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다 해서 만족스런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소?"

"자네는 정말 한가로운 소리를 하는군. 이 세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 한 끼로 하루를 때는 사람들도 많다네. 그런 그들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아마 자네를 때려죽이려 할 걸세."

여후량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바로 그것이오. 나는 그들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오. 음식이 남아돌아 멀쩡한 것까지 버리고, 곳간 안에는 곡물이 썩어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육노조의 말씀대로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오. 왜 그래야 하오? 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해야 하오?"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놀랍군."

"가진 자들은 더 가지기 위해 혈안이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그들에게 혹사당하고 있소.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소. 가진 자의 것을 덜어내고 못 가진 자들이 최소한 먹고, 자고, 입는 것만큼은 걱정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소."

말하는 여후량의 얼굴에는 확고한 신념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는 이 순간이 매우 행복한 듯 보였다.

"보주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그들과 같이 한 끼를 위해 모진 고생을 하고 있었을지 모르오. 내가 철혈보의 은혜를 모르는 것도 아니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세상을 바꿔야 하고 마침 그러한 뜻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었소. 그것이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요."

"자네는 몽상가군. 그런 세상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가? 게으르고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 밥을 주고자 한단 말인가? 피땀 어린 노력도 하지 않은 자들에게 안락한 삶을 주려한단 말인가?"

"세상은 그들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소. 세상은 그들을 어리석고 게으르다고 버렸소. 가진 자가 누리는 많은 혜택과 가능성 중 단 하나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소. 그리고는 세상은 그들이 본래 게으르고 천박한 족속들이라고 치부해 버린 것이오."

육능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이 바뀌면 그것이 가능할까? 단지 지금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또 다른 가진 자를 만드는 것이 아닌… 자네가 말하는 가난하고 불쌍한 그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것이라 믿는가? 그들의 가난과 고생이 덜어질 것으로 진심으로 믿느냔 말이네."

"내 생각은 확고하여 변함이 없소."

여후량의 태도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정말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도솔천을 꿈꾸는군. 그럴 리도 없겠지만 자네가 원하는 세상으로 바뀌어도 자네는 분명 후회할 것이네. 어쩌면 자네는 또 다른 가진 자가 되겠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들은 여전히 한 끼를 위하여 고생할 것이기 때문이지."

"육노조는 틀렸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버렸소. 버린 자가 얻고자, 더 많이 얻고자 지금 가진 것을 버리는 짓은 하지 않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먼저 버린 것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오. 그리고 나와 내가 선택한 그분은 반드시 만들 수 있을 것이오. 나는 그분을 믿소."

이념(理念)이란 종교와 같다. 마음을 빼앗긴 믿음이란 모든 것을 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종교와 같이 머리로 다가서면 쉽게 빠져들지 않는다. 허나 마음으로 다가서면 그 이론적인 것까지 믿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자네가 말하는 그분이란 모용화천인가?"

"짐작하신 그대로요."

"정말 이상한 일이군. 자신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그 자가 도대체 자네 같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믿음을 준다는 일이 가능한 일인지 정말 이해할 수 없네."

정녕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후량은 모용화천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모습이었다. 뛰어난 두뇌로 보자면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여후량마저 어떻게 저리될 수 있는지 육능풍으로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분은 그 사명으로 평생을 어둠 속에 묻혀 사신 분이오. 그분의 진심을 알게 된다면… 육노조 역시 그분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 본다면 비로소 이해하게 될 거요."

"노부는 그런 정신 나간 자와 만나 되지도 않을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없네."

"그럴 것이오. 육노조 같은 분은 평생 그렇게 누리며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그러기에 육노조는 그분을 비난할 자격이 없소. 우리 인간에게 나쁜 버릇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오. 상대를 조금도 이해하지 않고 비난하는 일 말이오."

우리 인간은 그렇다. 특히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더욱 그렇다. 기존의 가치관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아예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아니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아예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이 미약한 힘이라도 얻어 그들의 의견을 내놓으려 하면 맹렬하게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비난으로 멈추지 않으면 힘을 동원한다. 그들이 가진 모든 권력과 부로 자신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린다. 그리고는 말한다. 우매한 백성들을 현혹하는 간악한 놈들이라고… 대의를 위해 악(惡)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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