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98회

등록 2006.03.29 08:30수정 2006.03.2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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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헙.....!”


여후량의 몸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입을 꽉 무는 포정이 심한 고통을 참는 듯 보였다. 동시에 살기를 떠올리며 내려졌던 손이 움직였다. 그 손에 잡혀있던 비수가 독고향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악---!”

독고향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하지만 그녀는 왼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비틀었다. 그녀의 왼손. 거기에는 아주 작은 듯 보이는 비수의 손잡이가 잡혀 있었는데 그 날은 이미 여후량의 아랫배를 파고들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네...네 년이.....”

여후량의 몸은 확연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를 감은 왼 팔에 힘이 들어가며 독고향의 허리가 약간 숙여졌다. 또 다시 여후량의 비수가 그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악....! 당신이 나를 거부할 때부터......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지 알았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 후욱....”

그녀는 입가에 피를 주르륵 흘리며 차갑게 말했다. 지독한 고통이 밀려드는 듯 했지만 참는 것 같았다.


“독한 년..... 그렇다고 남편을.... 욱....”

독고향의 왼손이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따라 여후량의 아랫배 쪽에서는 더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 역시..... 독고가의 피를.... 받은 몸이야. 하학.... 차마.... 오빠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당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그 동안 부부간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십여 년을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했다. 육능풍을 비롯한 철혈보의 인물들은 물론 나타난 인물들도 너무나 급작스런 사태에 어안이 벙벙한 듯 했다.

“겨우.... 계집에게.....아직 할 일이 많은데.....”

여후량이 입에서 피를 쏟으며 중얼거렸다. 잘 드는 비수는 이미 그의 아랫배를 갈라놓고 내장을 헤집어 놓았다. 정신이 아득해 오고 그의 몸은 독고향의 몸과 동시에 옆으로 넘어갔다. 참담한 일이었다. 남도 아닌 부부끼리 서로의 몸에 비수를 박아놓고 죽는 모습은 차라리 비극이었다.

“끄르르......”

나동그라진 두 남녀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목으로 넘어오는 피로 인하여 호흡을 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낭패로군....!”

청룡기주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손을 쓰지 못했다. 이제는 늦었다. 여후량의 아랫배는 절반 정도 갈라져 밖으로 내장이 비치고 있었다.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살려내기 어렵다. 살려내야 하는 인물인데 결국 살리지 못했다.

그것은 육능풍을 비롯한 철혈보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주가 없는 상황에서 누이가 이런 죽음을 맞게 했다는 자책감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육능풍의 얼굴에 서서히 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왔지만 나갈 수는 없는 곳이 본 보라네.”

그의 시선은 보기 드물게 진지하고 냉정해 철혈보의 인물들은 육능풍이 진짜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구나 그의 전신에서 서서히 일렁거리는 무형의 기운은 이미 주위 사람들을 움찔하게 만들만큼 강맹해지고 있었다.

허나 육능풍을 마주보는 청룡기주도 전혀 물러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여후량의 죽어가는 모습에 혀를 차다가 육능풍의 말에 오히려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본 기주는 철혈보를 접수하러 온 것이지 그냥 나가려고 온 것이 아니오. 그 간 육선배의 위명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소. 개인적으로도 무림오대기병 중 하나인 육선배의 일월신륜이 어떤지도 매우 궁금했소.”

“아마 보고나면 후회할걸세.”

육능풍이 한 발 나서자 방 안의 공기는 갑작스럽게 살벌해졌다. 아마 육능풍과 청룡기주 중 누군가가 손을 쓰기 시작한다면 나머지 인물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무림제일문인 철혈보의 풍운...... 허나 이런 일은 철혈보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중원 주요문파 곳곳에서 풍운이 일고 있었다. 중원에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

백여덟 개의 생사금침(生死金針). 불빛에 자잘한 금빛 파편을 뿌리며 눈을 현란케 한다. 크기도 다르고 두께도 다르다. 이미 화로에 그을리고 천으로 하나하나 문질러 닦고는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의술에 있어 그 마지막이 되는 것이 침술(鍼術)이다. 진맥을 하고 약을 처방함은 의가(醫家)에 입문한 의원이라도 할 수 있고, 큰 실수만 아니라면 약을 잘못 처방했더라도 그리 치명적이지 않다. 하지만 침술은 다르다. 자칫하면 당장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침을 몇 번 사용한 적은 있어도 생사금침은 처음이었다. 부친께 배운 바는 있어도 한 번도 시술해 보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생사금침. 생사금침은 다른 방도가 없을 때 사용하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다른 방도를 강구해 보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온몸의 혈맥이 팽창해 타는 듯 붉게 달아올라 있는 피부와 어느 구석 성한 곳이라곤 보이지 않는 전신. 상흔이 크고 작게 그어져 있고, 둔기로 맞은 듯한 여러 곳에 멍이 들어 부어올라 있다. 이미 약을 처방해 복용시켰지만 임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시간이 없었다. 시기를 놓치면 어찌될는지 모른다.

더구나 생사금침은 매우 위험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시술을 받는 사람에게 매우 유익할 수 있었다. 생사금침의 효능은 몸 안의 탁기나 불순물을 모두 몰아내고 전신을 세수(洗髓)한다는 점. 벌모세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몸 안에 있는 독이나 미약은 물론 탁기를 모두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침을 잘못 시술하면 사지가 마비되거나 폐인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더구나 주요 대혈을 위주로 꽂는 생사금침은 하나만 삐끗해도 목숨과 직결된다.

“정말 괜찮겠어?”

자꾸 망설이고 있는 갈인규의 모습 때문이었다. 남궁산산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물었다. 침상 위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담천의가 죽은 듯 누워 있다. 시커멓게 변색이 되고 화상을 입은 듯 군데군데 붉게 달아올라있다. 허나 갈인규는 자꾸 선뜻 손을 쓰지 못하고 생사금침 하나를 들었다가 다시 놓기를 반복했다.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까닭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누님께 부탁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형님의 몸에 파고든 미약은 해독이 되지 않소. 여자와 방사를 한다 해도 잠시 지연될 뿐이오. 하루가 지나지 않아 끊임없이 여자의 몸을 탐하게 만들 거요. 온 몸의 정력이 고갈되어 죽을 때까지 말이오.”

아주 지독한 미약이었다. 사내의 정혈이 완전히 고갈될 때가지 여인과 방사를 하게 만드는 미약이라니..... 남궁산산은 이해했다. 석실에서 이성을 잃었다고는 하나 담천의는 기력이 고갈될 때가지 자신의 몸을 탐했던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겠지?”

그녀의 물음에 갈인규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남궁산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탄식과 함께 말했다.

“휴우..... 그렇다면 자신 있게 시술해. 만약 담오라버니가 깨어 있었다면 흔쾌히 그렇게 말했을 거야.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인데.....”

너무 막중한 책임을 갈인규에게 지운 셈이었다. 그의 부담감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 달려있었다. 더구나 아직 회복되지 못한 부상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계속 담천의에게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갈인규는 심호흡을 했다. 청백지신(淸白之身)을 버린 사람도 있다. 그는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부친이 일러준 말을 되새겼다. 생사금침의 사용은 생사대적을 만나 혈투를 벌이는 것과 같다. 그는 온 몸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갈인규의 공부 역시 낮지 않은 편. 온 몸을 편안히 하고 운공을 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윽고 눈을 뜬 갈인규가 생사금침 하나를 집어 들어 거침없이 거궐혈(巨闕穴)에 꽂았다. 이어 기해혈(氣海穴)과 중극혈(中極穴)에 이어졌고, 갈인규의 손놀림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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