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비행 다녀올게. 4일 후에 보자"

아시아나 항공 승은이 사무장을 통해 본 여성과 일

등록 2006.03.30 18:48수정 2006.03.3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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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풍’이라는 소리가 자주 들리지만 일터의 여성들은 여전히 힘들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자녀를 둔 직장 여성들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고 있다. 우먼타임스는 일하는 엄마들의 직장 현장, 육아 노하우, 가족 이야기를 담은 ‘워킹맘 프로젝트’를 기획, 대한민국 여성들이 장벽을 넘어 일터에서 멋지게 활약할 수 있는 비결을 알아본다.


우먼타임스
[권미선 기자]아시아나 항공의 승은이(36) 사무장. 이화여대 졸업 후 1992년 아시아나항공 승무원으로 입사, 14년째 근무 중이다. 현재 747점보기의 캐빈 매니저(사무장)이며 대통령 전용기, 일명 ‘코드원(Code One)’에 탑승하는 승무원이기도 하다.

비행기 승무원은 국제선을 탈 경우 장기 출장이 불가피하고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는 여성들에게는 특히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문제를 극복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살리고 있다. 직장 동료이기도 한 남편과 10살짜리 아들을 둔 승은이씨는 일에 대한 긍지와 가족의 도움으로 승무원으로 당당히 활약하고 있다.

“준영아, 엄마 비행 다녀올게. 4일 후에 보자.”

전화로 아이에게 이런 말을 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준영이는 처음부터 이런 엄마에게 익숙해 이제는 “공부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잘 다녀오라”며 격려까지 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 언니 집에 아이를 맡기고 “준영이 잘 놀아? 준영이 좀 바꿔줘”라고 하면 아이는 이상하게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그때마다 언니는 “준영이가 너 생각하는지 보고 싶어도 절대 내색 안하더라. 딴일 하다가도 ‘엄마 이틀 밤만 자면 집에 와요?’라고 묻기만 하고…. 엄마를 그리워하면서도 엄마 힘들까봐 말 안하는 것 보면 참 대견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때와는 다르게 훌쩍 큰 준영이는 이젠 엄마에게 억울함도 호소하고, 자기 의사도 맘껏 표현하며 친구 같은 아들이 되어주고 있다. 오늘은 ‘뉴욕행’이다.


친절하게 웃고 승객이 원하는 서비스만 하는 것이 승무원 일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특히 전체 승무원을 지휘하고 기내 서비스와 안전을 책임지는 캐빈 매니저인 만큼 내가 해야 할 일의 범위는 더욱 늘어난다.

요즘은 최근 탑승을 시작한 747 점보기종에 대한 공부까지 하느라 더 바쁘다. First Class(최상위급) 손님들과 장시간 대화를 나눌 일이 종종 생기기 때문에 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신문이나 시사잡지를 구독하는 것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은 승객의 좌석과 이름을 외우고, 승객의 취향에 맞춰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명 ‘호칭 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에 승객 이름까지도 전부 외워야 한다. 비행 전, 승객의 이름을 빠른 시간 내에 외우기 위한 승무원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긴 비행을 하면서 가만히 나를 돌아볼 때면 난 참 행운아라고 생각된다. 아이를 출산한 뒤 복직하면서 ‘과연 내가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을 가졌는데 그 후 난 승무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하는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코드원 탑승 6년이 넘은 베테랑이라 해도 탑승 때마다 긴장되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곳에서 평소에 만날 수 없는 유명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색다른 배움을 얻고 있다. 복직 후 신입사원처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할 때, 한 선배가 이렇게 힘을 북돋워주었다.

“은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난 믿는다. 넌 꼭 잘해낼 수 있어!”

그 이후 계속 그 선배의 가르침을 받으며 일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선배는 대통령 전용기 탑승 승무원으로 나를 추천까지 해주어, 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직장 동료인 남편의 후원은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내게 한다. 남편은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지이다.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항상 의논하고 서로 조언을 해주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큰 장점이다.

내가 외국에 나가 있을 때 나보다 더 아이를 잘 돌보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얼마 전 남편이 747점보기 매니저가 된 것을 축하한다며 노트북을 사주었다. 더욱 일을 잘하라는 격려의 선물이었다. 옷이나 아이용품이 아니라 아내의 직업을 인정하며 노트북을 사주는 남편을 생각하면 일에 대한 기쁨은 배가된다.

요즘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승무원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많은 후배들이 나를 믿고 따르며, 내가 비행기의 안전과 서비스를 책임지는 매니저라는 것도 나를 흥분시키는 요소이다.

일을 포기하고 육아를 선택했다면, 지금의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까?

“일을 해야 내가 성장한다.
일을 해야 가족이 끈끈해진다.
일을 해야 진짜 행복을 알 수 있다.”

요즘 내 가슴에 꼿꼿하게 들어 있는 희망의 메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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