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400회

등록 2006.03.31 08:05수정 2006.03.3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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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우조장은 부복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은 단사로부터 내려와야 한다. 균대위는 하나이지만 명령체계는 각 대(隊)와 위(衛)가 독립적이다.

"일단 가서 쉬도록…."


단사가 고개를 끄떡이자 그제 서야 우조장은 몸을 일으켰다. 가슴과 어깨, 그리고 옆구리부터 허벅지까지 그어진 상처로 보아 지금 몸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허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이상 내색할 처지도 아니었다.

"……!"

우조장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고는 부축을 하는 탁조장에게 기대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물러났다. 단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일까? 아니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균대위에 대한 배신일 수도 있었다. 풍철한을 볼 면목도 없었다. 그 순간 장원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악----!"
"악----!"

비명소리는 어둠을 뚫고 길게 울려 퍼졌다. 허나 그것도 잠시 다른 쪽에서도 연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를 이어 급박한 호각소리가 장원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삐익---삑---!

또 한 번 단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적이 쳐들어온 것이다. 어떻게 이리도 빨리 쳐들어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단사가 장원 뒤쪽으로 몸을 날리자 풍철한은 비명이 터진 다른 곳으로 몸을 날렸다.


헌데 한 전각의 지붕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다섯 명의 노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각의 용마루 위에 한가로이 서 있었는데 한결같이 육순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허나 한 노인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얼굴색이 백발과 같은 흰색이어서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였고, 모두 깡말라 있었다.

"대낮이었다면 아마 눈이 멀었을지도 모르겠군."

용마루 중간에 앉아있는 매부리코 노인이 무언가 질겅질겅 씹으며 말을 던지자 주독에 빠져 있었던 듯 코가 빨갛게 변해 있는 노인이 말을 받았다.

"왜… 오랜만에 밖에 나오니 감회가 새로운가?"

대답한 노인이 바로 풍철한이 말한 육양수(六陽手) 임릉(林稜)이었다. 허나 대답은 매부리코를 가진 노인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나왔다.

"별로 나오고 싶지도 않았네. 자네 협박에 못 이겨 나오기는 했지만…."

용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던 노인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노인의 눈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가늘고 매서워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했다. 노인임에도 벗겨진 앞머리 때문인지 넓은 이마와 사각 턱이 한 눈에도 매우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육양수가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무곡(武曲)께서는 아직도 소제가 사기 쳤다고 말씀하시는 거요?"

무곡(武曲).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별의 이름이 무곡성(武曲星)이다. 검은 구름을 일으켜 벼락이 치도록 명하고, 하늘의 모든 별을 부릴 수 있는 권능을 가졌으며 수명을 주관하는 영험함도 지닌 별로 알려진 자리다. 자미궁의 경호별로 일곱별 중 힘이 가장 세다는 별.

과거 균대위에서 무곡성의 자리, 바로 현재 풍철한이 맡고 있는 개양대(開陽隊)의 대주였던 인물이다.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육양수 임릉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이 노인이다.

"사기도 지나치게 친 것 같군. 저런 아이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하자는 것인가? 저런 아이들이 균대위 소속이라고…? 담명장군의 아들이 저런 아이들을 믿고 균대위를 움직이고 있다는 건가?"

날카로운 힐책이었다. 육양수는 내심 불만이었지만 무곡이라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균대위에 애착이 깊은 인물이 바로 무곡이었다. 누구보다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 바로 무곡이었다.

그로인해 십오 년 이상 햇볕을 쬐지 못하고 살아야 했지만 그렇다고 후회할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또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재고할 여지없이 다시 그렇게 할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도와 달란 것 아니오?"

"도대체 후사를 맡은 화권금장(火拳金掌) 악조량(岳操梁), 마형귀(馬荊鬼) 두광(斗廣), 그리고 뇌흔도(雷痕刀) 운보(橒甫)는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직했지만 고막을 후벼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노기가 끓어오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눈에는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균대위의 인물들이 보이고 있었다.

"악형은 십여 년 전 타계했소. 제자를 남겨 지금 천선위 위장을 맡고는 있지만 어찌 악형을 따라갈 수 있겠소? 두형과 운형은 신검산장에 있소."

"저런 아이들을 믿고 말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군."

노인의 비꼬는 말투에 심사가 뒤틀린 육양수가 코를 씰룩거렸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퉁명스런 어조로 말을 밷았다.

"누군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아 그런지 아시오? 무곡께서 그런 일을 벌이고 난 후 우리는 쥐새끼처럼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소. 가까스로 비원의 원주와 타협은 보았지만 거의 절반 정도가 균대위를 떠났소."

"빌어먹을… 그 때 확 뒤집어 버렸으면 모든 게 끝났을 텐데…."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성질은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면벽을 하면 무엇하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참선을 하면 무엇을 하나? 급한 성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다고 뭐 해결되었겠소? 숨 붙이고 살아있는 게 다행이지."

무곡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참는 듯 했다. 어차피 뜻을 같이 했다면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거사(擧事)였지만 대부분이 동조하지 않았다. 하기야 육양수 말대로 거사가 성공했더라도 어떻게 상황이 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무곡이 흥미를 느낀 듯 물었다.

"헌데 저 자식은 누구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덩치 큰 놈 말이야?"

장원 곳곳에서 피 터지는 혈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 한쪽 장내에서 덩치 큰 사내가 장검을 휘두르며 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양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 덩치 큰 사내의 입에서 장원 전체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귀신 놀음이나 하는 시러배 잡놈들 같으니… 나는 풍철한이야! 네깟 놈들에게 당할 내가 아니란 말이다."

그의 장검이 어둠을 가르며 그를 향해 공격해 오는 세 인물을 향해 쓸어갔다. 한결같이 흑색 면구를 쓴 자들이었다. 풍철한의 검은 음유한 가운데 광폭함을 담고 있어 달려들었던 흑의인들은 감히 마주치지 못하고 급히 피하고 있었다.

"풍철한…? 비원 쪽에 붙은 그 풍철영인가 하는 놈의 동생이던가?"

"맞소."

"허허… 그래. 기억나는군. 덩치만 크고, 철없이 날뛰던 그 녀석이야. 그래도 꽤 하는데…? 아마 무당의 검을 배웠다고 했던가?"

"저 아이 호가 양의검(兩儀劍)이오."

"거창하구먼. 그래도 제대로 검을 배웠어."

"지금 개양대의 대주가 저 아이요."

"뭐…?"

무곡은 어처구니없는 미소를 흘렸다. 자신이 맡고 있던 자리를 저 아이가 맡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균대위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 개양대를 맡는다. 또한 가장 냉정하고 잔인한 자들만이 개양대에 소속된다. 허나 무곡의 눈에는 꽤 쓸만하긴 했지만 개양대의 대주로서는 아직 멀었다. 그러다 문득 무곡의 가는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저 자는…? 왜…?"

익숙한 과거의 동료. 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풍철한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제 93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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